어제의 〈엑소시스트〉 글에 이어 또 이런 글을 쓰자니 몇 개월~몇 년 묵은 화제에 대해 뜬금없이 한 소리 던지는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만……. 최소한 헛소리는 아니니까 넓은 마음으로 봐주세요.

 올해 6월에 웅진출판사의 "문학에디션 뿔"을 통해서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네 권(과 제프리 디버가 쓴 공식 본드 소설 신간)이 출간되었지요. 듀게에서도 (언제나 고마우신) 날개 님께서 소개를 해주셨고요. 그때 DJUNA 님께서도 6월 19일자 여러 가지...를 통해 언급을 하셨는데, 제가 새로 나온 한국어판의 번역이 별로라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느냐 사느냐』의 경우 첫 문단부터 큼지막한 오역이 있더라는 덧글을 달았습니다. 그러자 DJUNA 님께서 어떤 오역이냐고 물으셨어요.

 플레밍의 작품이 제대로 출간되기를 고대했던 독자로서, 당시 저는 새로 나온 한국어판의 번역에 경악해서 이건 정말 그냥 번역이 안 좋다고 덧글로 찍 싸지르고 말게 아니라 좀 길게 다루어서 출판사에도 알리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사명감을 가졌더랬습니다. 그래서 책 앞부분만이라도 원문 대조를 한 결과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하는 일이 다 그렇듯 바쁘다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DJUNA 님 덧글에 시간에 맞춰 답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최근에 제 지인이 제가 선물했던 제임스 본드 한국어판(번역이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선물한 이유는… 그 친구가 워낙 제임스 본드를 좋아하는데 원서를 읽을 수는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어요.)을 잘 읽었다고 하기에, 문득 이 문제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어젯밤에 조금이나마 이 문제를 다루는 글을 쓰기로 했어요. DJUNA 님께서는 지난 3개월 사이에 이미 한국어판 제임스 본드 소설을 확인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이 책에 관심을 가지신 모든 분들께 (열었던 지갑을 닫는 방향으로)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면 출판사에게 너무 혹독하려나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물론 출판사에서 다시 번역을 하는 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추억의 대상은 될지언정 인기를 얻기는 힘들 작품이라 그럴 만한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힘들고요.

 하여간에…….

 아래는 한국어판 『죽느냐 사느냐』의 도입부입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미리보기 서비스에서 가져왔습니다. 『죽느냐 사느냐』를 선택한 건 순전히 제 책장에 이 작품의 원서가 있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아래는 원서의 첫 문단입니다.


 There are moments of great luxury in the life of a secret agent. There are assignments on which he is required to act the part of a very rich man; occasions when he takes refuge in good living to efface the memory of danger and the shadow of death; and times when, as was now the case, he is a guest in the territory of an allied Secret Service.


 첫 문단부터 문단 전체를 잘못 옮겼습니다. 이 문단은 "비밀 요원으로 살다 보면 대단히 호사스러운 순간이 찾아 온다."라는 첫 문장 이후 세미콜론으로 이어진 세 구가 병렬구조를 이루는 문단입니다. 즉 "호사스러운 순간"의 세 가지 예가 나란히 열거되는 거죠. 이 부분을 다시 옮기자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밀 요원의 삶에는 대단히 호사스러운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엄청난 부자를 연기해야 하는 임무를 맡는 때도 있다. 잠시 안락한 생활로 물러나 위험에 대한 기억과 죽음의 그림자를 지워내야 하는 때도 있다. 그리고 또, 바로 지금처럼, 동맹국 정보부의 관할권에 손님으로 가는 때가 있다.


 세미콜론의 역할과 문장 사이의 논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이 대목에서 이미 이 책의 번역을 용서하기 힘들어졌습니다만, 조금 더 보겠습니다. 다음 문단은 별 거 없고, "다른 승객들과 함께"로 시작하는 그 다음 문단.


 원문은 이렇습니다.


 When he left the aircraft with the other passengers he had resigned himself to the notorious purgatory of the US Health, Immigration and Customs machinery. At least an hour, he thought, of overheated drab-green rooms smelling of last year's air and stale sweat and guilt and the fear that hands round all frontiers, fear of those closed doors marked PRIVATE that hide the careful men, the files, the teleprinsters chattering urgently to Washington, to the Bureau of Narcotics, Counter Espionage, the Treasury, the FBI.


 "다른 승객들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린 그는 미국 보건국, 이민국, 그리고 세관 체계의 악명 높은 연옥에 자신을 내맡겼다."라는, 플레밍 특유의 감각적인 문장에서 그리 옮기기 어렵지도 않은 "연옥"을 삭제하면서 시시한 정보 전달형 문장에 그치고 만 정도는 넘어가겠습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플레밍은 이런 대목 빼면 시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문장은 네 줄에 달하기 때문에 한 문장으로 옮길 생각을 한다면 다소 까다롭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he thought"입니다. 이 대목은 본드의 상상을 묘사한 대목입니다. 플레밍은 이런 식으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운용하면서도 본드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판단하며 앞으로 다가올 위협이나 쾌락을 미리 한껏 맛보는 수법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 작품 『죽느냐 사느냐』의 대미를 장식하는 산호초 고문 장면이 대표적인 예이죠. 그런데 한국어판은 이걸 완전히 무시하면서 "적어도 한 시간 동안 머물렀던"이라며 본드가 이미 한 시간을 보건국, 이민국, 세관 체계에 시달린 것처럼 묘사하면서 판을 깹니다. 이건 영어 해석 이전에 그냥 논리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해석인데, 왜냐하면 이후 계속 이어지는 이 장면에서 플레밍은 본드가 이런 입국 절차에 대해 상상하며 그 과정을 불편하게 여기는 까닭을 한껏 늘어놓은 다음에 갑자기 CIA 요원을 도착하여 특권을 발휘함으로써 본드가 아무런 번거로운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입국을 해버리는(심지어 여권 도장도 공항을 나가서 차 안에서 CIA 요원이 찍어줍니다!), "대단히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그러니까 첫 문단에서 첩보 요원 생활의 호사스러움을 꺼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던 거죠. 한국어판의 역자는 이 대목의 흐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 저 긴 문장을 매끄러운 한 문장짜리 한국어로 옮길 자신은 없지만, 대충 옮겨 보면 아래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번역을 잘 해서 자꾸 새로 옮겨보는 게 아니고요, 어쩐지 이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씹는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다른 승객들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린 그는 미국 보건국, 이민국, 그리고 세관 체계의 악명 높은 연옥에 자신을 내맡겼다.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릴 테지. 그는 생각했다. 그 한 시간을 보낼 뜨겁고 칙칙한 초록색 방에는 해묵은 공기며 후텁지근한 땀, 그리고 모든 국경지대에 감돌기 마련인 죄의식과 두려움의 냄새가 가득하리라. 용의주도한 사람들과, 파일들과, 그리고 워싱턴을, 연방마약단속국을, 방첩국을, 재무국을, FBI를 향해 황급히 덜커덕거리는 전신기들을 숨긴 채로 "출입금지" 표식을 내걸고 닫힌 저 문을 향한 두려움의 냄새가.


 첫 두 페이지에서 이미 이런 번역을 내놓는 역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설령 역자가 그렇게 옮겼다고 하더라도, 그걸 간과한 채로 책을 내버린 출판사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저는 결국 역자 홍성영이 옮긴 『카지노 로얄』과 『죽느냐 사느냐』 뿐만 아니라 뿔에서 출간한 제임스 본드 시리즈 전체를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역자분들도 참여하셨던데, 그분들께는 특히 죄송한 일입니다. 그분들이 번역한 작품은 읽어보지도 않고 이런 결심을 하게 돼서. 하지만 시리즈 일부를 일일이 번역 검토해 가면서 띄엄띄엄 사느니……. 안타깝습니다. 책 만듦새만 보자면 뿔 측에서도 결코 대충 내지는 않았던 터라 더 그렇고요. 본드 시리즈가 우리나라에 다시 새로운 번역으로 소개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요. 이 즐거운 오락물을 남에게 권하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니. 정말 기꺼이 지갑을 열 생각이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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