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배 고양이 밥 좀 주고 올께요.


연구실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듀게질이나하며 빈둥거리다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일어나는 후배에게 무심코 어디가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고양이? 밥?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 두 가지가 고양이와 밥인데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죠. 잘하면 고양이가 밥먹는 모습도 볼 수 있겠다 싶어 나도 가자며 따라 나섰어요.

후배는 어디서 났는지 작은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참치캔 비슷한걸 들고는 우리가 나온 건물의 후미진 곳으로 갔어요. 반지하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옆에 어두컴컴한 환기구 비슷한게 보였어요.

후배는 그곳이 고양이가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고양이는 어디있어? 기대했던 고양이는 간데 없고 빈 고양이 참치캔 하나만 뒹굴고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곳에 고양이 참치캔을 따두면 알아서 고양이가 찾아와 먹는다는 거였어요.

고양이가 밥먹는 모습을 너무도 보고 싶었던 저는, 그래서 너는 고양이가 밥먹는걸 본 적이 있냐고 물어봤죠.

그 후배는 어슬렁거리는 고양이에게 참치캔을 따주며 유혹해 봤는데 냄새만 맡고 돌아가는걸 본 적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근처에 참치캔을 놔두고 갔더니, 나중에 왔을 때 참치캔이 비어있었다고.


아아

비록 배가 고프지만 남이 주는 음식에 쉽사리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 도도한 모습이라니. 저는 보지도 못한 고양이의 기품과 우아함에 가슴이 뭉클해 졌어요.

인간과 길고양이의 교감이 성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번에는 내가 꼭 고양이 밥을 챙겨주겠다고, 허공에 삿대질까지 해가며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제 저녁 처음으로 편의점에서 고양이 참치캔을 샀어요. 1500원이더라고요. 생각보다 비싼편이 아니더군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비밀 장소에 가서 빈 깡통을 치운 뒤 맛있는 참치가 가득 담긴 새 깡통을 놓고 왔어요.



신나는 일을 하긴 했는데 뭔가 좀 꺼림직하더라고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고양이는 내가 그 밥을 주고 갔는지 알 길이 없잖아요.

'야 그럼 니가 밥 주는지는 고양이가 알아?'라고 물었을 때 후배는, '몇 번 마주친 적도 있고 직접 놓고 간 적도 있으니까 알지 않을까요?'라고 말했거든요.

근데 그 고양이는 나를 본적은 없으니까 최소한 제가 그 밥을 놓고 갔는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니까... 아마 그 후배가 계속 놓고 가는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갑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질투가 솟구치더라고요. 야. 그 밥 내가 놓고 간거라고!! 앞으로 그 곳에서 밥먹는 고양이를 만나면 꼭 그렇게 말해주리라 다짐했어요.

근데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꼭 내가 줬다는걸 알려주고 싶어서 밥을 놓고 온건 아닌거 같더라고요. 물론 저도 고양이랑 교감하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한 것이지만, 사실 그렇잖아요.

길고양이 입장에서 이 사람이 밥을 줬는지 저 사람이 밥을 줬는지 알 게 뭐에요. 그냥 밥만 잘 먹고 다니면 되는거지. 제 생각도 사실은 그런거에요. 어짜피 니가 무언가를 먹고 다닐테지만 그게 내가 준 것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저는 또 갑자기 가슴이 따뜻해지며 제 자신이 자랑스러워졌어요.

아, 이게 바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구나. 비록 너는 다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낄지라도, 그 빗나간 방향의 고마움마저 나에게는 행복이겠지...라는 되도 않는 감상에 빠져,

저는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 지지 못한 사랑을 보지도 못한 고양이와 나누는 세상에 둘도 없는 낭만주의자, 사랑의 전도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굉장히 뿌듯했어요. 비록 내 몸은 사실상 고자이지만, 내 사랑의 정신은 죽지 않았어!라는 자부심도 들고.


그리고 제가 꺼림직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혹시나 제 닉네임과 같은 사람이 와서 참치캔을 비우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겠죠? 아니길 바랍니다.




2. 어제도 해가 다 떨어진 이후에야 연구실로 향하던 저는 근처 편의점에 들러 고양이용 참치캔 하나를 사들었습니다.

오늘은 그 비밀의 장소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혹시나 만나게 되면 네 녀석이 어제 먹은 참치캔이 내가 준 것이라고 생색도 내고 새로운 참치캔을 따고 들이밀며 쿨하게 자리를 뜰 즐거운 망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더랬죠.


아니 그런데 그 어둡고 으슥한 쪽 벤취에 앉아있는 어떤 인영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불길한 예감이 들어 발소리를 죽이고 조금씩 다가갔는데 어두워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있는거 같았어요.

그러니까 두 사람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한 사람이 고개를 빼들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에 밀착해 있는 형태였던거죠.


못 볼 꼴을 본 저는 얼굴을 화끈거리며 방향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건물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너무 짜증나고 화가 났어요.

아니 거기가 어딘줄 알고 그러고 있는거냐고. 신성한 고양이들 밥먹는 곳인데 니들이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되냐. 고양이가 배고파서 나한테 삐지면 니들이 책임질꺼야. 니들 같으면 누가 옆에서 그러고 있는데 밥이 넘어가겠냐. 등등

저는 제 사리사욕 때문 아니라 순전히 고양이의 안부가 걱정이 되어 정체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그 커플에거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고양이보다도 못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수경언니가 2년만에 승리를 거두는 감격적인 장면을 눈물을 훔치며 확인한 저는, 집에 가는 길에 아까 두고 오지 못했던 참치캔을 가지고 다시 그 곳으로 갔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무도 없더라고요. 저와 고양이, 그들 모두에게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비어있는 참치캔이 뒹굴고 있었어요. 제가 놔두고 간 모양대로 눕혀져 있던게 아니라 세워진 채로 비어있었습니다. 아마 그 녀석은 코를 박고 참치캔을 이리저리 핥았겠죠.

덕분에 조금은 마음이 풀렸어요.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고요. 새 참치캔을 두고 빈 깡통을 거둔 뒤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거기서 그러시면 안되죠.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물론 몰랐으니까 그랬겠지만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그 곳은 인간과 고양이의 교감, 나아가 이 시대에는 보기 힘든 보답없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성스러운 장소니까. 어둡고 외로워서 고양이들이 더 마음놓고 드나들어야 하는 곳이니까.



그리고 제발 좀

그런건 안보이는 곳에 가서 하시라고요, 안보이는 곳에 가서.

당신들 말고 나 같은 사람들 좀 생각해줘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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