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25 15:19
황순원 전집을 읽고 있어요. 지금 7권까지 왔습니다.
단편들은 영 제 취향이 아니라서 겨우겨우 읽어냈지만 장편들은 아주 좋네요.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1955년 1월부터 1년동안 연재된 장편소설로, 6.25전쟁 중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옥주'라는 술집 작부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전쟁 중에 모든 가족을 잃고 결국 싸구려 색주가의 작부가 되어요.
자신을 자주 찾아오는 손님과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책을 보다가 한대 얻어맞은 듯이 딩~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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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데?"
"수술한 자리예요. 임신한 지 여덟달 만에 배를 가르구 죽은 앨 꺼냈어요. 남편의 전사 통지서를 받구
마루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정말 하늘이 캄캄하드군요. 결혼한 지 보름만에 군대에 나갔어요. 남편이
돌아올 날만 기다리는 게 단 하나의 희망이었죠. 우린 서로 사랑했거든요, 진정으루.... 남편이 죽은 뒤에두
그이의 영상은 내 가슴에 그대루 살아있었어요. 그이 왼쪽 귓바퀴 속에 팥알만한 사마귀가 있었어요. 그 빛깔까지
똑똑히 보였어요. 가난한 우리라 그이가 살았을 적에두 호사는 못했죠. 때때로 교외루 나갔어요. 그때 내 이마를
스친 부드러운 바람결의 감촉이라든가, 그이 어깨에 고개를 기대구 눈을 감구 있을 때의 아늑함, 그러다 눈을
뜨면 햇빛에 반짝이며 흔들리는 나뭇잎들, 그 하나하나가 그대루 살아있었어요. 난 그것들에 쌔여서 살았어요."
그네가 말을 끊고 잠시 어둠 속에 몸 하나 까딱않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말예요, 그것들이 점점 제 빛을 잃어갔어요. 첨에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서두 똑똑히 뵈던
그것들이.... 그이 귓바퀴 속에 있는 사마귀빛이 희미해지구 햇빛에 반짝이든 나뭇잎들의 모양도 희미해져갔어요.
난 그것들을 되살리려고 애썼어요. 그렇지만 소용없었어요. 그것들은 자꾸 희미해만 가는 걸요.... 이제는 그 부드러운 바람결의
감촉두 되살릴 수 없구, 그이 어깨에 기대면 느낄 수 있었든 아늑함도 사라져버렸어요. 그저 남아있는 건 이 뱃가죽의 흠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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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 작부로 전락해버린 한 여자가 자신을 자주 찾아오는 손님에게 마음을 열고 지난 세월을 털어놓는다..... 자주 보던 신파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어요. '옥주'가 워낙에 무표정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해왔기 때문일까요.
자신의 이런 이야기 끝에 '요즘 세상에선 술안주감도 못되는 센치'라고 덧붙이는 그 체념적 태도 때문일까요.
전후문학 중엔 참 마음아픈 것이 많아요. 우울하네요- >저야 말로 왠 '센치'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