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영화는 굉장히 흥미있는 장르입니다. 법정이라는 패쇄적인 공간 속에서 검찰과 변호인 또는 변호인들끼리 벌이는 두뇌싸움과 논쟁은 때로는 스릴러 영화가 주는 박진감을 능가케 해 줘요. 여기 뽑은 10편의 영화가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법정영화입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취향으로 뽑았기 때문에 진짜 보석같은 걸작이 누락되었을 수도 있을거에요. 순서는 제작연도 순이에요.

 

1. 뉘른베르크의 재판 (1961)

 

 

감독 : 스탠리 크레이머,  출연 : 스펜서 트레이시, 버트 랭카스터, 마를렌 드트리히

 

법정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야한다고 모범 공식을 보여준 클래식 필름이에요. 2차대전 종전 후 열린 전범 재판을 사실감있게 재현한 작품으로 헐리웃의 사회파 감독이라고 불리는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대표작이기도 하죠. 스펜서 트레이시, 버트 랭카스터, 마를렌 드트리히, 몽고메리 클리프트, 쥬디 갈랜드 등 호화 캐스팅과 180분의 긴 러닝타임으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2000년에 알렉 볼드윈 주연으로 리메이크되었는데 원작의 명성을 뛰어 넘지는 못하였죠. 

 

 

2. 피고인 (1988)

 

감독 : 조나단 카프란,  출연 : 조디 포스터, 캘리 맥길리스

 

 

버치필드 변두리 작은 술집에서 한 젊은 여성이 3명의 남자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합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당시 피해자가 선정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피의자에게 단순폭행 혐의만을 적용합니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당할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논리가 작용한거죠. 이건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죠. 멀리 갈 것도 없이 올해 발생한 고대 의대생 사건에서도 피해자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사실들이 법정에서 거론되었다고 하잖아요. 피해자에게 가혹하고 가해자에게 관대한 사회적 현실이 좁은 법정 안에서 숨막힐 정도로 재현되고 , 같이 분노하고 공감하면서 볼 수 있는 작품이에요. 포털에서 검색해 보니까 저렴한 할인가로 DVD를 구입할 수 있네요. 못 보신 분에겐 꼭 권하고 싶은 영화에요.

 

 

3.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1990)

 

감독 : 김유진, 출연 : 원미경, 이영하, 김민종

 

 

성폭행 사건을 다룬 우리나라 영화에요. 평범한 주부가 밤길에 2명의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하는데 방어 본능으로 저항하다 한명의 혀를 깨뭅니다. 그 여자는 도리어 혀를 깨물린 남자에게 고소를 당하고 그때부터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게 됩니다.   졸지에 행실이 불량한 여자가 앞길이 창창한 청년의 앞길을 막았다는 비난까지 듣게 된거죠. 상대방 변호사로부터 듣는 인격적 모독과 남편, 시댁 식구로부터 받는 차가운 시선은 여자를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위에 소개한 피고인과 유사한 소재지만 한국적인 상황요인까지 겹쳐서 보고 있는 내내 더 불편하고, 분노가 치밀게 하는 영화에요. 이 작품은 아쉽게 DVD로는 출시가 되지 않았네요.  

 

 

4. 뮤직 박스 (1990)

 

감독 : 코스타 가브라스, 출연 : 제시카 랭, 아민 뮬러

 

 

유능한 여성변호사가 유태인 학살혐의로 고발을 당한 아버지의 변호를 맡아서 혐의가 없음을 입증하는데 성공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전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고 가족들에게 너무나 다정하고 인자한 아버지가 실은 2차대전 당시 용서받을 수 없는 학살을 저지른 홀로코스트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핏줄의 정, 그리고 진실과 정의 사이에서 어떤 것을 택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본 작품은 관객들에게 매우 불편하고 어려운 질문을 던져요. 코스타 가브라스의 연출이 깔끔하고 주연을 맡은 제시카 랭의 연기가 빛나는 작품이에요. 물론 법정에서의 박진감 넘치는 재판 과정도 볼만해요. 알라딘에서 2900원이란 파격적인 가격으로 DVD를 팔고 있네요.

 

 

5. JFK (1992)

 

감독 : 올리버 스톤, 출연 : 케빈 코스트너, 씨씨 스페이식

 

 

유명한 케네디 암살사건의 배후를 캐는 내용으로 구성된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92년 작이에요. 순수한 법정영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케빈 코스트너가 분한 짐 개리슨 검사의 분투가 생생하게 그려진 작품으로 기억해요. 물론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결과가 명쾌하게 제시되지는 못하였지만 케네디 암살사건의 배후를 캐는 수사 과정이 법정 장면보다 더 볼만했던 작품이었어요. 수수께끼의 인물로 나오는 도널드 서덜랜드의 연기가 아주 인상적이었죠.

 

 

6. 일급살인 (1995)

 

감독 : 마크 로코, 출연 : 크리스찬 슬레이터, 케빈 베이컨

 

 

국선 변호인으로 법조인의 첫발을 띄게 된 젊은 변호사가 일급살인 사건을 첫 임무로 맡게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법정 최고형을 받는 것이 명백한 사건이었죠. 별로 탐탁지 않게 임무를 시작한 그는 피고인과 면담 과정에서 이 사건 배후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알카트라즈란 참혹한 환경 속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피폐화되는가를 소름돋을 정도로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7. 프라이멀 피어 (1996)

 

감독 : 그레고리 호블렛, 출연 : 리차드 기어, 에드워드 노튼

 

 

정신감정 결과 어린 시절 학대로 인해 억압적 기억상실을 앓고 있는 19세 살인 용의자를 잘 나가는 변호사가 무보수로 변론해 줍니다. 뒤 이어 나오는 증거들은 범인이 그 소년임을 더욱 확실케 해주는데 여전히 변호사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변론을 진행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이 소년이 진범인지, 결백한지 알쏭달쏭해지지요. 법정 영화의 반전은 이렇게 만드는 겁니다. 올해 국내 최초의 법정영화라고 공개된 '의뢰인'은 이 작품을 보고 배웠어야 합니다. 라스트에서 에드워드 노튼의 그 서늘한 연기는 관객들을 오싹하게 만들어 줬죠.

 

 

8. 에린 브로코비치

 

감독 : 스티븐 소더버그, 출연 : 줄리아 로버츠

 

 

두번의 이혼 경력과 돈도, 마땅한 경력도 없는 싱글 맘이 변호사 사무소에 막무가내로 눌러 앉아 일을 시작하지만 변호사들은 그의 복장도, 거친 태도도 영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랍정리를 하다가 발견된 의학기록 속에서 대기업 화학공장에서 유출되는 유해물질이 주변 주민들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거대기업과 힘든 싸움을 시작합니다.  이 작품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변호사가 아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싱글 맘이 활약을 하는 특이한 법정영화에요.

 

 

9.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2008)

 

감독 : 수오 마사유키, 출연 : 카세 료, 세토 아사카, 야쿠쇼 코지

 

 

한 청년이 지하철에서 여고생을 성추행하였다고 현장에서 검거됩니다. 검찰에서는 자백을 권유하면서 만약 자백을 하면 초범이기 때문에 형이 매우 가벼워질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하지만 청년이 완강하게 혐의를 부정하면서 재판이 진행됩니다. 여성 변호사가 그의 변론을 맡게 되지만 성추행 사건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 영 탐탁치 않습니다.

'당신이 범인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변론을 중단할거에요'  이렇게 변론은 시작되는데요. 영화는 피의자와 피해자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이 되지 않고 건조하고 담담하게 진행됩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 사건이 아니고 형사 사건으로 기소될 경우 99.9% 유죄로 판결되어지는 일본 사법 제도의 문제점이었기 때문이죠. 수오 마사유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재판이란 사회 질서 유지의 수단으로 증거와 법률에 의거해 객관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10. 음모자 (2010)

 

감독 : 로버트 레드포드,  출연 : 제임스 맥어보이, 로빈 라이트

 

 

최근 몇년간 본 법정영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은 필름이에요. 링컨 암살사건을 공모한 혐의로 붙잡힌 여관을 운영하는 평범한 두 자녀의 어머니 메리. 젊은 변호사 에이컨은 상관의 지시에 의해 내키지 않는 변호를 맡지만 시간이 갈수록 메리가 무죄라는 확신이 들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반드시 링컨의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민중들의 집단 광기와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혼란을 막고 희생양을 찾아야겠다는 지배계층의 공모는 메리와 에이컨을 점점 더 압박합니다. 이 영화 역시 실화로 링컨 암살 사건의 이면에 또 다른 이런 무고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에 먹먹해 하면서 상영관을 나서게 하는 수작이었어요. 엔딩 크레딧이 흐르면서야 로버트 레드포드의 이름을 확인하고 저는 과연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지요.. 

  

 

위의 10편 말고도 좋은 법정영화는 많이 있어요. 하지만 10편으로 압축해야 한다는 제 강박관념 때문에 빠진 영화도 있고, 제가 모르고 있는 작품도 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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