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하혈을 좀 했습니다.

덕분에 피가 멈추지 않은 채로,  낯선 동네까지 의료보험 되는 응급실을 택시 타고 굽이굽이 찾아가는 소동까지 벌였습니다.

첫 하혈 때 피의 양이 좀 많아서 유산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임신 중엔 유산이 아니라도 하혈이 날 만한 원인이 꽤 있더군요.

아기는 내내 건강합니다. 초음파를 들이대면 심장은 쿵쿵쿵 뛰고, 아이는 혼자서도 잘 노닐어요.

 

하혈 덕에 '절대안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시체놀이'와 다름없는 것으로, 최대한 움직임을 줄이고 침대에서 누워지내라는 뜻이에요.

자의로 쉬기 위해 그러는 것이면 모를까, 이것도 일삼아 의무적으로 하려니까 못할 노릇이더군요. 없던 두통까지 생겼습니다.

대신 집안일을 하는 남편은 집안일+바깥일 콤보로 점점 지쳐가는 모양이에요. 자꾸 싸우게 되더군요. 

아기와 제 몸에 관한 걱정만큼이나, 부부사이가 이렇게 점점 멀어지게 될까 하는 것도 요즈음의 큰 걱정입니다.

 

 

그러던 중에, 어제 초음파를 보았어요. 아기의 상태와 출혈 양상을 보기 위해서.

 

출혈은 앞으로 하던 대로 계속 절대안정을 취하며 조심하는 수밖에 없고요.

아기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아기의 성별을 가늠할 만한 때라서, 남편을 통해 검사자에게 물으니,

글쎄 여자아이랍니다.

 

 

저는 사실 되게 기쁩니다.

남편도 주변 어른들도 다 아들을 원하셨거든요.

저는 임신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 바람대로 '어여 아들 하나 낳아놓고 끝내자'는 생각도 없잖았어요.

하지만 제 깊은 마음 속에서는, 가뜩이나 임신을 원하지 않았고 아기에게 낯선 감정을 가지고 있는 임산부에게

동성인 딸이 주어진다면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첫 육아에 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아들이면, 주변분들이 첫손자라는 생각에 더 많이 참섭을 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의 제 기분은  (이런 비유를 끌어대는 게 좀 웃기지만),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간신히 첫 임신을 해서 공주를 낳았을 때 했다던 말과 비슷해요.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가 아니지만 난 너를 사랑한단다.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것이 되었겠지만, 너는 내 것이고 너는 내가 보살필 거야.

너는 나와 기쁨을 함께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게 될 거야."

 

 

 

뱃속 아이가 딸인 걸 안 이후로는, 그전에는 거의 하지 않던 태담을 저도 모르게 도란도란 하고 있어요.

인터넷으로 저렴한 아기용품을 찾을 때 프릴이나 주름이 예쁘게 진 옷을 보면 막 행복해져요.

지금껏 '내 아기'라는 호칭도 잘 쓰지 않았었는데-제가 얼마나 나쁜 엄마였는가 하면, 하혈을 해서 유산가능성이 있을 때도

비교적 침착했어요. 냉정을 지킬 만큼의 마음이었던 거죠- ,요즘은 자꾸만  '귀여운 내 새끼'란 말이 떠올라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되었나 모르겠어요 -_-

그리고 아이의 앞날에 대해서도 자꾸 상상하게 되어요. 그전에는 아이의 앞날, 하면

'밤에 자지 않고 우는 갓난아이' '고집부리고 밥안먹는 미운 세살' '이상한 머리모양을 하고 이게 최고라고 우기며, 화나면 안 보이는데서 제 엄마를 육두문자 써서 부르는 사춘기 청소년'

이런 것밖에 상상이 안되었거든요(어지간히 부정적이었죠).

그래서 더 아이키우기가 싫었어요. 저도 자라면서 저런 모습이 분명 있었기에 더욱더.

그런데 딸인 걸 알고는 저런 것들은 생각나지 않고,

내 딸이 어떤 여자가 될지 너무 궁금하고 기대감이 들어요.

 

 

그리고 요즘 서서히 드는 생각이었지만,

임신도 한번쯤은 해볼만한 것 같기도 해요.

저는 비록 지금도 임신으로 인한 여러가지 문제 탓에 겪어본 적 없는 일들로 힘들고 마음을 썩이고 있으며,

여전히 다시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지만, 또한 지금까지도 아이 없이 호젓하게 사는 부부의 삶을 간절하게 꿈꾸지만,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두루두루 해볼만하다는 점에서는 임신도 한번쯤 겪어볼 만한 경험이라고 생각이 돼요.

비록 지금의 임신으로 제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달라지리라는 보장도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요.

 

 

설마 이 생각도 임신 중의 호르몬이 빚어내는 변덕스런 생각일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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