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에 대한 단상

2011.11.12 20:14

amenic 조회 수:1453

몇 해전에 민족주의자라 자처하는 몇 명과 인터넷 상에서 토론을 한 적 있습니다. 그들은 특히 강한 반일감정을 갖고 있는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일본문화와 일본제품 사용에 반대할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일제강점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이 망언을 계속하는 일본과 당장 국교 단절하고 모든 일본인들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과 한 토론에서 다뤄진 주제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그들과의 토론을 소개하기 앞서 먼저 제가 생각하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하여 정의를 내려 보겠습니다. 민족주의는 상당히 다의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지만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創建) ·유지 ·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이라고 하는 데에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민족주의는 비합리주의와 감성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에르네스트 르낭도 민족이란 외형적으로 결정된 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영혼이며 정신적인 원리라고 하였습니다. 민족주의의 태동을 보면 그것은 더 명확해집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6세기 이후 기독교 세계의 통일이 무너지고 로마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많은 독립국가가 나타났는데 이들 국가는 그 대부분이 절대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국민들이 이것을우리들의 국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 존재였습니다. 왕이 국민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이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는 하나라고 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었죠. 말하자면 민족주의는 민중의 필요성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통치권자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학교 교육에서 민족주의에 대하여 일종의 세뇌를 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죠.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그것을 유지.확대하려 하는 민족주의의 속성 때문에 방어적으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종국에는 외부로의 진출과 정복이 따르게 되고 그것을 민족정기의 회복이라고 미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겠는데요 그들과의 토론은 세가지 주제로 압축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 세가지 꼭지를 중심으로 저의 생각을 풀어 보겠습니다.

 

첫째. 민족주의가 왜 필요한가?

 

그들의 첫 번째 주장은 사람이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민족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고 민족이 존재하는 한 민족주의는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저도 동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단위가 꼭 민족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혈통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나라도 존재하기 때문이죠. 카자흐스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카자흐스탄은 대략 120여 민족이 국가를 이루어 살아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고려인은 120여 민족 중의 하나가 된다고 하고요. 그리고 민족이라는 것을 칼로 무 베듯이 간단히 나누는 것도 힘든 일이라고 하지요. 물론 저 역시 구심체로서의 민족공동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민족을 인정하는 것과 민족주의를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자는 민족의 정체성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일종의 신앙과도 같은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와 비교하지 마라

 

두 번째 주장은 희생과 봉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치나 일본 극우주의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기본 성향이 반일주의자였다고 앞서서도 말씀 드렸었죠. 이들의 저에게 어떤 인터넷 사이트를 보여 주었습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군들이 자행한 만행들의 사진을 전시한 사이트였죠. 몸서리 쳐지게 끔찍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잔인한 행동을 한 자들과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동일하게 볼 수 있냐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 사진들을 근거로 일본인들은 절대로 우리가 앞으로도 영원히 상종해서는 안될 종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진 한 장이 게재된 링크를 그들에게 제시하였습니다. 한홍구 교수의 저서 '대한민국 史'에 삽입된 사진 중의 하나인데요 6.25전쟁 당시 우리측 군인이 좌익청년을 사살하고 목을 잘라 들고 웃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이 좀 끔찍하기 때문에 링크로만 걸어둡니다.

 

http://cfile229.uf.daum.net/image/1703A54F4EBE538511CD48

 

그리고 이야기 하였죠.

나도 일본군의 만행 사진을 보면서 분개한다. 인간이 이토록 악해 질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사진들이 일본이 나쁜 근거라고 한다면 생각을 좀 달리한다. 어찌 보면 이러한 악행들은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18세기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 까지 열강들의 식민지 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던 것들이다”.

 

그때 그들과 토론하면서 주장하였듯이 저는 나쁜 민족과 좋은 민족이란 것이 애초에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구분하면 우리 민족 역시도 부끄러운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우리 군인들 역시 그곳에서 양민들을 학살했던 증거가 나오지 않았나요? 멀리 가지 않더라도 1980년 광주에서 진압군으로 투입된 공수특전대도 이에 못지 않은 행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 행동에 면죄부를 주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잊자는 말도 아니고요. 결코 잊을 수 없는 만행을 수없이 저질렀지요. 하지만 일본이라는 인종적, 혈통적 특성을 놓고 일반화하여 재단을 하는 것에는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본 내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상대적으로 일본이란 나라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그리고 어떤 민족/국가이건 인종과 혈통을 기준으로 해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저는 반대합니다. 일본군의 만행을 알린 그 사진들도 일본 민족이 나쁜 이유라기보다는 식민주의, 극우적 파시즘이 나쁜 이유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휩싸이면 인간들은 누구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악마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홍구 교수 저서에 들어간 사진 속의 군인도 인간을 죽인 게 아니라 빨갱이 한 마리 잡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이었겠지요.

 

셋째.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제하에 저항했던 민족주의자를 부정하는가?

 

세 번째로 붙은 논쟁은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제하 에서 저항했던 민족주의자, 애국자를 부정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저의 대답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죠.

 

일제치하에서 투쟁하였던 선열들의 행동은 저 역시 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투쟁하였던 것 역시 시대적 상황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21세기에 접어든 현시점에까지 그분들의 민족주의를 계승 발전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민족주의는 공격성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배타성과 자민족중심에 빠지게 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약소국가의 애국심과 강대국들의 국수주의는 다르다고 하는 주장도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약소국가의 방어적 민족주의와 강대국의 공격적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백지장 한 장 차이지요. 방어적 민족주의도 힘의 역학 관계에 변동이 생기면 언제든지 공격적 민족주의로 전이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외세를 통해 많은 탄압을 받았던 우리 민족이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에게 보이는 태도를 보면 방어적 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구조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재일교포들의 차별대우에 분개하면서 이들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침해에 대해선 무관심하거나 가학적인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 민족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저는 민족주의가 갖고 있는 한계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와 피아(被我)로 양분하는 세계관을 갖는 것이 민족주의적 시각입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것은 악이요 이익이 되는 것은 선이라는 견지를 보이는 것이 민족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일본 내에서 정신대 할머니를 지원하는 모임은 일본의 민족주의 관점에서는 반민족주의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폭로했던 한겨레신문 구수정 특파원은 실제로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황우석 박사 사태를 고발했던 PD수첩팀도 그러했고요. 저는 방어적이건 공격적이건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점의 이율배반적 모습에 수긍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애국자가 될 수는 없는가 봅니다. 그보다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저서를 쓴 임지현씨가 말한 대로 인종적,종족적 개념 민족주의가 이제 공공적 시민적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는데 강력하게 동의합니다. 많은 수의 이주노동자가 이 땅에서 같이 부대끼며 살고 있고 동남아 여성들의 결혼이민으로 코시안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단일민족의 정통성을 자랑하고 세계에서 한민족이 가장 우수하다는 구호를 가슴 속에 간직해야 하는 것인가 의문이 됩니다. 우리와 생김새와 언어가 다른 이들과 서로 존중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며 결코 타 민족에게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 방안이 모색된다면 저 역시 민족주의를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될 때 그것을 과연 민족주의라고 불러야 할지는 조금 의문이 됩니다만 부르는 용어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 속에 내포하고 있는 생각이 중요하겠지요.

 

두서없이 쓴 글을 이제 마무리 지어야겠습니다

 

독일인지 프랑스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어떤 좌파 정치가가 정적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가"

이에 대해 그 정치가는 이렇게 멋지게 응수했다고 하는군요.

"나는 결혼이란 제도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아내를 사랑합니다"

 

우리 민족에 대한 저의 생각도 이와 동일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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