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황희, 전설

2011.11.16 18:26

LH 조회 수:4238

 

사극을 보면 이런 대목들이 흔히 나옵니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 든 신하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상소를 올립니다. 조금 더 비주얼틱하게 하려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쓰기도 합니다.

 

"전하, 신은 이미 나이가 늙어 내일 모레하는데 신의 마지막 소원일 따름입니다..."

 

당장이라도 숨이 꼴깍 넘어갈 듯한, 그렇게 평생을 나라를 위해 고생해온 사람이 그리 글을 적어올리면 펄펄 뛰던 왕이라도 숙연해지고 성질을 가라앉히곤 합니다... 만. 이것도 그거 쓴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요.

사실 장기근속으로는 황희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래서 그는 사직서를 무지무지 많이 썼습니다.

 

"저 이제 일흔인데 눈 나빠져서 글 잘 못 읽겠고요, 걷다가 쓰러지고 그럽니다. 일 좀 그만할래요."

 

평생을 수고한 늙은 신하의 애절한 부탁인데 어느 임금이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느냐만서도,
문제는 이 드립을 장장 20년 가까이 써먹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좌의정 시절에 그런 글을 올리고 이후로도 계속... 그러다보니 임금도 그렇고 다들 시들해하는 경향마저 나타납니다.
실제로도 황희의 사직서에 세종이 내린 답이란.

 

"아직 8, 90도 아닌데 그냥 일 하지? ^ㅂ^ 심한 병도 있는 거 아니잖아?"

 

...8, 90까지 부려먹을 작정인겁니다, 이 임금님은. 
나중엔 답하기도 귀찮았는지 그냥 허락하지 않았다, 라는 간단한 기록만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황희는 86세에나 겨우 은퇴합니다.

그래서 황희가 한 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세종실록을 열심히 살펴봐도 황희의 역할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보통 황희의 말에 따랐다, 라는 기록이야 많이 있지만 잘 보면 이건 황희 한 사람이 아니라 신하들의 총칭일 때가 많습니다. 영의정인 황희가 대표할 뿐이지요.


그건 황희가 토론의 지휘자로서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론은 참 민주적인 의견 결정 수단이지만- 잘 알다시피, 방향을 잘못 잡으면 산에도 가고 바다로 가며 때론 스타워즈로까지 치달을 수도 있지요.

황희는 그걸 지휘하며 적당한 선에서 끊고 재단하는 게 능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 황희가 (삐쳐서) 업무를 놓아버리면 난장판이 벌어지기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황희의 역할을 보면 세종이 이거저거 일을 벌일 때 태클을 걸고 지나친 개혁을 반대하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보수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좀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보통 황희의 활약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세종 말년의 불당 건립 사건일까요. 이건 사실이 아니긴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니 잠깐 해보겠습니다.

아내 소헌왕후와 아들 둘을 먼저 떠나보내고 여기저기 눈병과 당뇨에 시달리며 고생하던 세종은 불교에 마음을 기대게 되는데, 이에 여러 불교 행사를 벌이고 급기야 궁궐 안에 절을 세우겠다고 해서 신하들과 치열하게 싸웁니다. 아주, 굉장히.
자세히 이야기하자니 지금 너무 졸려서 생략합니다. 하여간 이 때의 세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온화한 임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고집불통 영감님입니다. 뻗대고, 억지부리고, 퉁퉁 대고.

 

"나 나쁜 왕이다 어쩔래! 니들 말 안 들을겨!"

 

그러면서 가출, 아니 궁출을 하겠다는 둥 쫑알쫑알 '떼'를 씁니다. 여기선 간단히 말하지만 이 때 세종은 아주 제대로 진상을 부립니다. 이거 뭐 3살 짜리 애도 아니고. 그렇지만 여기선 시간 없어서 생략. (방이 넘 추워요 ㅠㅠ)
이렇게 되니 신하들은 화도 내고 말리기도 했습니다.

 

"성군 근속 30년 기록중인데 왜 이러세요! 님 같은 성군에게 이런 말 들을 줄 몰랐어요!"

 

그러면서도 "그 때 임금님은 중전마마를 잃으셔서 마음이 허해서 그랬다, 주변의 나쁜 중들 때문이다."라고 실드를 쳐주었으니, 그것도 세종실록의 사관들이 그랬습니다. 뭐 사육신을 비롯한 세종의 빠돌이들이 집필진이니 오죽했겠냐만 서도.

이렇게 황희를 비롯한 신하들과 세종은 티격태격 싸워댑니다. 그냥 겉으로 뿐만이 아니라 물밑 작업도 벌어졌건만 세종은 계속 왕궁 내 절 건립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신하들은 사표를 내고 떠나가고, 집현전마저도 자리를 비웠으며 성균관의 학생들은 휴학을 하고 집에 돌아가버립니다.

 

보통은 이렇게 되어 세종이 "신하들이 날 버렸어... 내가 이제 혼자 있는 늙은이가 되었네?" 하고 눈물을 펑펑 흘리자, 보다 못한 황희가 "제가 해결할께요." 하고 나서서 학생들을 달래 돌아오게 했다, 라는 훈훈한 이야기...로 마무리 되지만. 사실 이 중간 단계에 이야기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실은 세종은 꼭지가 돌아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주고 돈도 대주고 이뻐했는데 이놈들이 감히 날 저버려? 그래서 배신감에 몸을 떨면서(...) 명령을 내립니다.

 

"의금부 시켜 학생들 몽땅 다 잡아 가둬! 누가 주모자인지 족쳐!"

 

이런 연산군st한 파격적(?)인 명령에 혼비백산한 것은 도승지 이사철. 그는 최대한 천천히 명령을 전달합니다. 임금님이 재촉하는 데도 미적미적. 그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대신들이 임금님을 말리기 위해 달려오고, 의금부 사람들은 차마 그런 일은 못하겠다며 뻗댑니다. 그리고 모든 신하들이 임금님의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눈물을 쏟습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애들이잖아요,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요, 기타등등. 웬지 신파드라마의 가정에서 벌어질 듯한 애 때리려는 가장을 말리는 시추에이션이 펼쳐지고 세종은 여전히 입술 삐죽 내리면서 난 못된 왕이다, 어쩔래 하며 명령을 거두게 합니다.

 

그리고 도승지 이사철이 성균관의 선생들을 불러 학생들을 설득해 학교에 나오게 했다... 고 합니다. 이게 실록에서 말하는 실체인데, 중종 때 즈음 가면 황희가 학생들을 하나하나 만났다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광조가 그리 말했거든요. 실제 황희의 나이라던가, 실제 이 사안에도 나오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그러지는 못했겠다 싶네요. 그래도 웬지 사실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저 자신이 있습니다.

 

황희가 유생 및 젊은 신하들의 설득에 나섰다는 그림을 상상해볼작시면.
나이 여든 다 된 노정승입니다. 꼬꼬마 유생들 + 신하들이 기저귀차고 있을 때 유배도 다녀오고 조선의 창건을 지켜본 레전드입니다.
그런 분이 비틀비틀 힘든 걸음을 해서 집 문을 똑똑 두드리며 "자네, 학교에 다시 나오지 않겠나...?" 하고 권유하는데 대체 어느 누가 거절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늙은 신하가 손자 뻘 되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만나 나라의 앞길을 부탁하며 다시 공부를 해줄 것을 당부하는 모습...
바로 그런 식으로 장장 20년 넘게 사람들을 낚아왔음을 모르는 순진한 학생들...

이게 또 가능한 게 황희가 세기의 미노년이었다는 데 있지요. 신선같은 모습을 가졌다고 하는데다 좀 어이없는 성추문(?)까지 돌았으니 말입니다.

황희 이야기를 하려다가 세종 이야기로 빠졌네요.

그런데 이 방이 너무 추워서 더 찾아서 쓸 엄두가 안 납니다 ㅠㅠ
으드드드. 이제 따듯한 방으로 가야겠네요.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정작 써야 할 글은 안 쓰여지는데 이런 건 잘 쓰여지네요. 편집자님,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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