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말 하는 일이 없으니 별 걸 다 꺼내들고 뒤비적거리네요.

지난 메일 찾을 게 있어 뒤지다가 발견한 08년 초의 메일.

대학원 다니던 세 학번 위의 선배랑 주고받은 건데 이 분이 시 쓰는 분이었고 저는 비평분과였으니

이래저래 볼 일이 많았죠. 교수님들 모시고 하는 회식자리 돌고 돌다가 얘기가 잘 통했던가 그냥

그분이 저한테 꽂혔던가; 우짜든동 정신 차리고 보니 올드하고 손발 오그라들고 개 진지한 메일을 매일매일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거의 제 얘기만 했는데, 그는 초 집중해서 들어주었기 때문에

편지놀이에 몰입도가 높았었드랬죠.

  

 

지금쯤 홍대앞에 있겠군. 집에 들어갈 때면 아노미에서 해제돼 있어야 할텐데.

막 친해졌든 깊게 친하든 간에 대화를 나누는 동안은 친하게 느껴져. 항상 남을 신경쓰며 살 순 없지만 

한번쯤 남의 입장 속에 들어앉아 생각해 보는 것. "대화만으로도 세상은 변한다."는 말도 있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본위긴 하지만, 글쟁이들은 얼굴 한번 못본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누군가(누굴까) 말한 것처럼 약간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하면 그 순간이 즐겁더라.  지나고나니 궁금해지더라구. 

네가 말한 '자기본위'의 틀에서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인지.

 

     모든 인간의 과오는 조바심에, 방법적 절차를 성급하게 파기하는 것,

     그리고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을 노골적으로 은폐하는 데 있다.(Kafka, 1994, 3)

 

다음번엔 더 오래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 술이 없어도 말이지. ㅎㅎ 

덧) 그때 얘기한 소설가 두 명 중에 '해이수'를 제외한 한 명이 누구였지?

  

 

뭔가, 뭔가 처음부터 끝까지 좀 올드패션하지 않슘미까. 90년대 여성작가 소설의 한 구절같아요.

저때 한창 이론서 공부할 때라 무슨 뜬구름 잡는 얘기들을 막 하는데(메일 제목이 말브랑슈 데카르트 우인론 이러고 막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오빠가 지금의 저보다 어렸다고 생각하니 되게 귀여워요. 나한테 열심이었구나, 이런게 막 느껴지고.

그런가 하면 제 답장이 또 가관. 그때의 제 화두는 '연애의 실체는 무엇인가' 였던가; 뭔가 치열하게 고민하는데

내딛을 용기는 없고 그저 쭈뻣쭈뼛 머릿속으로만 잔뜩 생각한 뒤 실제로는 아무것도 못하면서 간만 봅니다(그 오빠가 아니라 관계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근데 이런 건, 지금도 잘 모르는 거지만 앞으로 더 산다고 해도 확실하게 알거나 결론내릴 수 있는 종류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적어도 진지했고 어떤 물음에 대한 치열함이 있었다는 점이 대견하긴 합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저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지만요.

이래저래 사는 게 꼬여 지금은 연락할 일 없는 분이지만 등단했단 소식은 안 들리는군요. 마지막으로 연락했을때 입에 담기도 뜨악한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워낙 연애형 인간이신지라 푹 빠져서 제가 하는 말을 그냥 뭐가 짖나, 이런 식으로 흘려들었던 기억이;;

언젠가 등단했단 소리나 듣게 됐으면 좋겠네요:)(.............그러나 시 개뿔 모르는 내가 봐도 그리 비범해 보이지는 않았거늘...)

 

어쨌거나 이 오빠랑 벱후 군대갔을때 이후론 누구랑 길게길게 편지 주고받을 일이 없네요. 돌이켜보니 그리운 정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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