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탈을 쓴 늑대 -진중권

2010.07.10 07:27

2Love 조회 수:5188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29&article_id=61413

 

정체성과 동일성

김규항이라는 이가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진중권을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 불렀다. 그의 구별에 따르면, 진보신당에는 한편으론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 사민주의적 전망으로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당원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고 자랑하나,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이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근데 내가 아는 한 촛불당원들은 노선투쟁 같은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의 언급 중에서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이라는 표현은 ‘사회주의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한편 “진지한 당원들”이란 표현은 정체성에는 문제가 좀 있지만 그래도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해서 나름 갸륵한 ‘사민주의자’를 가리키는 듯하다. 한편, 촛불 때 입당한 당원들은 일거에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들은 계급의 적, 즉 김규항의 표현을 뒤집으면 제 정체성을 잃고 추악한 세상을 그대로 온존시키려고 드는 진지하지 못한 당원이 된다. 아무 데서나 붉은 살 드러내는 이 좌파 바바리맨 쇼는 그냥 웃어넘기자.

흥미로운 것은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의 독특한 의미론이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이른바 북구의 사회국가들도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에 대한 이 생뚱맞은 적의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80년대 이념서적에 난무하던 어법이다. 이렇게 21세기의 한국을 졸지에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다투던 러시아 혁명기로 만들어놓았으니, 내친김에 차라리 ‘자유주의자’ 숙청하라고 선동을 할 일이다.

정체성의 폭력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른바 근대적 강박관념이다. 가령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이란 표현을 보자. 그는 이들의 정체성이 곧 진보정당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들만으로 진보정당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그가 편협한 것은 아니다. 정체성에 조금 문제는 있지만, 사민주의자들은 당에 좀 있어도 된다(이른바 ‘견인’을 해서 끌고 가면 되니까). 그런데 왜 진보신당의 당적을 갖기 위해 그의 개인적 정체성을, 혹은 그가 “제 정체성을 간직”했다고 판단하는 그 사람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진보정당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이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회주의가 뭔지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그 사람들도 모른다고 하고, 사민주의가 뭔지는 직접 유럽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개념이다. 촛불당원들은 대부분 그저 한나라당이 싫고, 민주당은 구리고, 그나마 진보정당이 제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해서 입당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향이 여러 가지 면에서 민주당보다는 좀더 진보적이라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진보정당에 들어오면 안되는가?

여기서 “제 정체성을 간직한”이라는 표현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정체성’(identity)은 동시에 ‘동일성’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당원들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야 비로소 당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당원 받을 때에 아예 이념조회를 하는 게 낫겠다. “당신은 사회주의를 믿습니까?” “아뇨, 전 공산당이 싫어요.” “그럼 사민주의라도 믿습니까?” “글쎄요. 그게 뭔데요?” “흠,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자유주의군요. 민주당으로 가세요.”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는 아마도 모욕을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것은 나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워낙 천성이 리버럴해서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못 봐주는 편이다. 한편, 진보정당에 적을 둔 것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특히 강력한 사회 복지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체제 중에 유럽식 사회국가 시스템을 선호한다. 그래서 진보정당에 남아 있는 것이다.

유학 시절에 만난 독일의 한 여학생은 내가 기독교인이면서 무신론자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고, 철학적으로는 무신론자이고, 윤리적으로는 쾌락주의자고, 논리적으로는 금욕주의자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자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고, 문화적으로는 무정부주의자다.” 그는 그 모든 규정들이 어떻게 머릿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정체성을 왜 패키지로 가져야 하는가. 그러는 김규항도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예수 족보 팔지 않던가?

진보정당 안에는 다양한 생각이 공존한다. 거기에는 유신론자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다. 자유주의자도 있고 집단주의자도 있다. 사회주의자도 있고 사민주의자도 있으며, 심지어 한-미 FTA에 찬성하는 당원도 있다. 선거연합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자후보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당과 통합하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야청청 나 홀로 걸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보신당에 정체성이란 게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 모든 생각들의 총합, 혹은 교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묻는다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은 아마도 ‘좌파를 가장한 우파’라는 뜻일 거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듣는 근거는, 중도에 사퇴했다고 비난을 받는 심상정씨의 말도 일단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보신당이 더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다고 믿는다. 거기에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일단 그로 하여금 말은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할 터. 이 당연한 요구를 했다고, 남의 이마에 함부로 딱지를 붙여댄다. 도대체 그 딱지 붙이기로써 내 주장의 뭘 반박하려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우파가 좌파를 가장해 무슨 영광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와 똑같은 비난을, ‘듣보잡’이라는 이름으로 마침내 유명해질 수 있었던 어느 불행한 청년에게도 들은 바 있다. 이 우익 스토커는 내가 한-미 FTA에 대해 반대한 적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실은 여러 차례 FTA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무튼 ‘무슨 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을 안 했다는 것’을 정체성 판단의 근거로 삼는 그 아스트랄함에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다.

왼쪽과 오른쪽, 서로 방향은 달라도 멘털리티는 동일하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포스트모던’의 근대비판이다. 90년대 이후 20년 동안 모두들 나서서 지겨울 정도로 근대를 반성했건만, 이 모든 지적 유행의 물결도 80년대 이념서적을 유일한 교양으로 간직한 고고한 정신만은 전혀 건드릴 수 없었나 보다. 그 포스트모던도 유행이 다 지나 이제 회고를 하는 시절. 그 시점에 마주친 이 비난의 형식(“그는 양가죽을 쓴 늑대다”)은 너무 복고적이어서 그런지 언캐니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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