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피겨 선수의 방송 출연을 놓고 시끌시끌하네요.
솔직히 비판하는 사람 마음도 이해가 가고 옹호하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가 가요.
게다가 이런 일이 생겨 당혹했을 그 선수도 측은합니다. 이런 여론이 생길 줄 알고 한 일이 아닐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 많아요, 아주 많습니다. 여기로 봐도 참하고 저기로 봐도 좋은데, 갑자기 한 구석에서 삐끗해서 이걸 계속 존경해야해, 말아야 해라고 갈등때리게 되는 일 말입니다.

 

이를테면 친일파 이야기만 하면 꼭꼭꼭 나오는 국사학계의 거두 이병도 선생님 말입니다.
정말 딱하게도 친일파 매국노 한 사람과 같은 집안이다보니 조카라느니, 자식이라느니 소문까지 붙어서 그 후손분들까지도 날벼락을 맞는 사태를 맞이하곤 하죠.

저는 딱히 그분의 제자가 아니니 대를 이어 존경할 필요는 없지만, 순수하게 학술적인 업적에서 존경합니다. 왜냐면요,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모든 기반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는 국사 대부분은 이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기존의 완전 듣보잡이었던 온달을 발굴해내기도 하고, 단군신화의 분석이라던가, 위만이 조선사람이라고 주장한다거나, 유리왕의 황조가라던가. 광복 직후, 아직 한국에 역사학 논문은 고사하고 학문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 한국의 역사를 하나하나 새로 쌓아올리고, 일본인들의 편견섞인 지식에 반박을 하면서 90살 넘어서까지 계속 논문을 썼으니 그 연구의 범위와 분량은 어마어마해요.

어떤 분야든지 공부를 하려면 그 분의 연구 결과부터 봐야 하죠. 아무도 가지 않은 눈 밭 위를 성큼성큼 걸어간 거고, 그 다음 연구하는 사람은 그 발자국을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그 분이 친일파래요. 일본인에게 배운 식민사관을 그대로 써먹었대요. 실증사학에만 집착했다며 비판도 나와요.

사실이 아닌 이야기도 있고, 또 변명할 거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당시에는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실증주의 경향이 유행하던 시기였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참 복잡하고 뒤틀려져있고 머리 아픈 현실인데, 어째 나오는 말은 친일파냐, 아니냐라는 말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폭탄 들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면, 잠재적인 친일파일 수 밖에 없지요. 그렇게 백번 양보해서 그 분이 친일파라고 침시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남긴 업적도 전부 갖다 버려야 할 쓰레기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병도 친일파 이야기를 듣게 될테고, 그냥 하자니 찝찝하고 모르는 척 하자니 말이 참 많아서 고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 이야길 들어볼까요. 시인 정지용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요.
그 사람이 지은 시를 참 좋아하고 향수를 자주 불렀습니다. 단어도 참 예쁘고 수더분한 시골 느낌이 나서 늘 그리워했지요. 그래서 그가 월북했다는 누명(?)을 둘러쓰고 그의 시가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화가 났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짓는 사람을 어떻게 모함할 수 있냐고.
그런데 좀 나중에, 정지용이 한참 운동할 시절(?) 적은 글을 봤는데... 우와, 한 끗발 하더군요.
그 글에서는 해설피 금빛을 구슬프게 노래하던 시인은 온데간데 없고 머리에 빨간 띠 두르고 이놈의 세상 뒤엎어버리자고 외치는 운동가가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월북했겠거니 생각을 해도 부족하지 않겠다 싶더라고요.

뭐, 지금까진 전쟁통에 사망했다는 게 정설입니다만.
정말 월북했다고 쳐요, 정지용 시 어쩔 거여요. 다 버릴 수도 없잖아요. 그렇게 좋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버리기 싫습니다.

 

이런 일 많이 있을 거여요. 존경하고 좋아하던 인물의 좋지 않은 점을 발견하는 당혹스런 경험 말이지요. 빅토르 위고나 마하트마 간디가 심각한 밝힘증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그리고 박연이나 황희가 뒷돈 참 많이 해먹었다는 이야기도 그랬고요. 그리고 작가라면 표절을 했다거나. 이런 거 정말 치명적이죠.
그럴 때 마다 실망하고 화도 나는 게 사람 본성. 그러다 고민하게 되죠. 이 사람을 더 좋아해야해, 말아야해? 하고.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게 어떻게 한 면만 있겠어요. 가카처럼 도덕적이고 완벽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아요. 누구나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그런 면도 있지요. 나쁜 점 때문에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면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런 경우를 허다하게 겪고 난 뒤, 저는 어떤 선을 긋게 되더군요. 용서가 되는 선과, 되지 않는 선.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이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선이라면 나름 변명도 해주며 계속 좋아하게 되고, 아니거나 아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예 뒤도 돌아보지 않는 거고요. 그 용납이란 선이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게 아니고 엿장수 맘대로이긴 합니다. 그래서 줏대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사람 감정이다보니 기계 스위치처럼 딱 온/오프로 나뉘지가 않더라고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시나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0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1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906
87235 그러고보니 올해가 여명의 눈동자 방영 20주년 되는 해이네요. [44] 감자쥬스 2011.12.01 4918
87234 한달에 드는 피복비 어느정도세요? [14] dhsks 2011.12.01 3349
87233 쿠팡 크리스피 & 크라제 버거... [2] 도야지 2011.12.01 1848
87232 [기사링크] 천연기념물 반달가슴곰 도심서 ‘출몰 소동’ [2] miho 2011.12.01 1083
87231 71% "한나라-민주 양당구조 바꿔야" troispoint 2011.12.01 797
87230 [사진] 문득 이 분이 생각나 검색해보니 [2] miho 2011.12.01 1154
87229 궁금증]남는 안경이나 옷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3] 라인하르트백작 2011.12.01 1209
87228 축하인사정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너무 민감들 하시네요 [11] 사과식초 2011.12.01 2747
87227 [회사바낭] 회의시간이 길어집니다. [2] 가라 2011.12.01 1010
87226 종편에서 TV도 뿌릴까요? [4] 가라 2011.12.01 1374
87225 결국 조중동이 바라는게 이거군요. [3] 가라 2011.12.01 2720
87224 당분간 국산 로맨틱코미디 영화 보기 힘들겠네요. [8] 감자쥬스 2011.12.01 3162
87223 [역사잡담] 오성과 한음의 유언비어 [8] LH 2011.12.01 2881
87222 [벼룩] 책, 만화 판매합니다. 많아요... [8] 뚜루뚜르 2011.12.01 1502
87221 중환자실 들어간 세계 자본주의, 병원비는 누가 내나? [1] 도야지 2011.12.01 1305
87220 피곤함과 스트레스가 사람마다 다른 증상으로 나타나나봐요.. [3] 무간돌 2011.12.01 1220
87219 짱구아빠는 어떻게 성공했나요?? [11] 도야지 2011.12.01 3117
» [역사잡담] 존경하는 인물의 당혹스런 선택을 놓고 [16] LH 2011.12.01 3325
87217 지금 jtbc에 나오는 내용 사실인가요? [16] 여은성 2011.12.01 5392
87216 살인에 관한 전 지구적 연구 [10] august 2011.12.01 237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