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담] 용비어천가와 아부의 전통

2011.12.03 18:20

LH 조회 수:3596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보았을,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쎄 곶 됴코 여름 하나니.

바로 1447년 간행된 용비어천가의 2장입니다.
1장 아니냐고요? 아녀요. 1장은 해동육룡이 나라샤- 로 시작합니다. 많이들 모르는 이야기죠. 저도 이거 쓰기 전까진 몰랐으니 말입니다.


어쨋든, 수많은 티셔츠와 벽지 디자인으로, 그리고 드라마의 제목으로도 활용되는 용비어천가입니다만, 동시에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는 말을 비유하기도 하지요. 이 사실을 세종대왕님이 아신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공중 3회전을 하고 다시 이불 뒤집어쓰고 눕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사실이 그런 걸.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조선에서 우리 집안이 제일 잘나가♪...라고 하면 세종대왕님이 우시겠지만 틀린 것도 아니지요. 조선의 건국을 맞이하여, 전주이씨 이성계 집안 우상화 및 독재의 시작... 을 위한 관제 영웅서사시, 속칭 깔때기 문학이지요.

제작에 무려 5년. 집필진에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강희안, 박팽년 등등 올... 까진 아니고 집현전 로케로, 국문 더빙이 포함되어 만들어졌습니다. 세종이 직접 제작에 참여할 정도고, 필요한 자료를 전국에서 긁어모아오게까지 했지요. 결정적으로! 제일 먼저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게 이 용비어천가지요.
전체 내용 중 1/3이 조상님 자랑, 나머지 1/3이 할아버지 태조 자랑, 나머지가 울 아빠 자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아부의 아이콘이 되어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요, 어차피 불우한 역사학과나 중세 국어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는야 용비어천가 두 번째 줄 이상을 아무도 안 읽을 거기 때문이어요.
뿌리깊은, 까진 알아도 그 다음 중국 임금이 어떻고 태조가 어떻고 하는 대목을 아는 분도 드물거여요.
왜냐면 재미없고 촌스럽거든요.
읽으셨다면? 당신의 근성과 튼튼한 신경줄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거 진짜 재미없어요. 뭐랄까 어이가 없어서 웃기기까지 해요. 쓔웅- 쓔웅- 콰광~ ...이렇게 요약하면 좀 그렇지만. 아무튼 세종대왕이 그걸로 자기 취미생활... 최초의 훈민정음 시범 케이스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게 만들어졌는지도 몰랐을 거여요.

 

세상 일이 그래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도 참 촌스러워지기 마련이어요. 오래 사귄 친구놈을 만나도 잘난척 하는 거 고이 듣기 괴롭습니다. 재미도 없고요. 하물며 조상님, 아빠 찬양인데 어떻겠어요. 그리고 그 아빠님이 참 훌륭한 일도 많이 하셨다면 하셨겠지만... 아유, 제가 말을 말지요.

하늘은 참 공평한 거 같아요. 태종에게 양녕대군 같은 사고뭉치 아들을 줬는가 하면 세종같은 효자를 동시에 줬잖아요. 세종이 얼마나 열심히 아빠와 할아버지를 위해 애를 썼는지 상 줘야 마땅합니다. 생각해보면 해준 게 뭔데 그렇게 열심히 챙겨줬나 몰라요. 어릴 때는 형만 이뻐했고, 좀 자라니까 외삼촌들을 작살냈고, 그 다음엔 처가를 아작내기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하기사 늙은 부모님 챙기고 매번 용돈 드리는 것은 보약 먹여 키운 큰아들보다 천덕꾸러기 셋째 아들인 법이지만요.

그래도 용비어천가는 국가 프로젝트지, 개인 단위의 권력자에게의 아부는 얼마나 유구하던가요. 지금도 많아요. 어느 때는 그 정도가 심하다보니 오히려 개그가 되기까지 하죠. 형광등 100개라던가.

그런데 이런 권력자에게의 아부는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힘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힘이 사라지면 안녕 안녕이라는 것.

조기유학 왔다가 입시에 실패해서 쫄쫄 굶으며 취직처를 찾던 최치원의 자소서가 "청소부라도 좋으니 써주세요 ㅠㅠ"였다가, 사표내서 신라 돌아갈 때는 "님하 안녕" 이었던 것처럼. 사람이 힘있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있는 것이고, 그게 없으면 정말 헌신짝처럼 돌아서는 법이니. 그래서 아부는 허무하고 아류 용비어천가들도 본 투 비 불쏘시개인 법이지요.
이승만 정권 때나 군사정권 시기의 신문지를 훑어보면 아부의 새로운 경지를 보곤 합니다. 박사님께 바쳐지는 한 떨기 목련화 같은 칭송이라던가 땡전뉴스 한 토막 보면... 그래, 모름지기 아부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랍니다. 하지만 그렇게 칭송받아온(?) 이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를 떠올리면 그렇게 닭과 친구해도 될 것 겉이 두두두 올라오는 닭살도 한결 완화되는 듯 하고 한결 편안하게 볼 수 있게 되요. 쌤통이다, 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런 거여요 결국.

요 근래 새로 시작한 방송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용비어천가가 흘러나온다며 불평하는 이야기들이 많네요. 염려마세요, 텔레비전을 끄고 누우면 잊혀질거여요. 그보다 더 세련되고 재미난 게 훨씬 많이 있거든요.


p.s : 졸립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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