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05 11:38
이제 날치기 통과에 관해서는 정형적인 프로세스가 생길 지경입니다. 여야 합의 시도 > 실패 > 다수당 단독 표결 시도 > 그 과정에서 몸싸움 > 하지만 결국 가결 > 소수당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 제기 > 헌재는 위헌성만 확인하고 무효 청구는 기각(혹은 위헌성도 없는 걸로 결론) >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법안 발효. 법안, 예산안, 이젠 조약까지 그 대상도 제한이 없습니다.
근데 저도 가겹게 날치기, 날치기 합니다만... 정확하게 날치기라는 게 뭐라고 봐야할까요? 국회에서 무언가가 통과되는 가장 매끄러운 프로세스는, 보통 여야가 같이 모여 합의를 하는 겁니다. 소위원회에서 다수당과 소수당이 밀당을 하면서, 다수당이 마련한 안에 소수당의 의견을 '일부' 끼워넣어주고 소수당의 이해를 구한 후에 국회 본회의에 올려 다수결로 표결하는 거죠. 소수당도 이해했으면 같이 찬성표 던져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될거고, 소수당이 끝내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회의에 간다면 다수당 표만 가지고 아슬아슬하게 통과될겁니다. 그 과정에서 반란표가 나오면 부결되는 극적인 순간도 있을 수 있고요.
정말 빼도박도 못하는 날치기는 미디어법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건 헌재에서도 과정에 심히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으니까요. 국회에서 그 위헌성을 제거하고 다시 하라고 했는데, 국회가 그냥 무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제대로 절차를 다 거치긴 했는데, 여야 합의는 안되었고, 그래서 소수당이 아예 투표 참가를 거부해버리거나(그나마 평화적 날치기), 아니면 투표 하지 말라고 본회의장 점거하고 난리를 쳤는데도 다수당이 질서유지권 발동하고 경찰 불러 끌어내가면서 억지로 통과시키는 폭력적 날치기(안타깝긴 하지만 실정법상으로는 소수당의원들이 국회 일정을 방해하는 범법자들)는 어떻게 봐야할까요? 이것도 정말 날치기인가요?
지금 야권은 날치기 통과된 FTA 무효화 하라고 난리입니다. 하지만 야권 역시 날치기의 역사가 없는 건 아니죠. 아마 누가 권력을 잡아도, 권력 핵심부가 의지를 가지고 밀어부치는 사안은 아마 절대로 날치기 되지 않을까요? 막말로 민주노동당은 현재 공공연히 한미 FTA 폐기를 주장하고 있는데, 만약 민노당에서 대통령이 배출되고 국회에서도 과반수 의석을 가지게 되면, 한미 FTA를 엎어놓는 사안이 국회에 올라간다면... 날치기 안하려나요? 한나라당과의 소위원회에서의 '조정'이 될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노무현 정권의 대표적인 무능을 꼽을 때 국회 과반수 의석까지 밀어줬는데도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못한 것, 사학법 개정안 기껏 통과시켜 놓고서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에 밀려 도로 개악해준 것 등을 꼽는데, 이걸 보면 현 야권 지지자들 역시 '우리 편의' 날치기는 별로 나쁘게 보지 않는 걸로 보입니다. 설마 노무현때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국회에 올리면 한나라당이 그걸 동의하거나 순순히 국회 본회의 표결에 참여했을까요?
이러니 날치기 주최측(?)에서는 항상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말로 쉽게 스스로를 방어해냅니다.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걸 볼 때면 대의민주주의 자체에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대안을 만들어내기도 어려운 상황이니까요.
이번 한미FTA를 보면 날치기를 안할 수도 있었습니다. 민주당이 요구한 ISD 문제나 손해볼게 확실한 농촌이나 다른 산업에 대한 보완책, 지원책 등을 '준비하겠다' 라는 말만으로 끝내지 않고 '이러이러하게 하겠다' 라는 식으로 여당과 정부가 협상을 할수도 있고 또 했어야 하는거였죠. 가카 귀국일정에 맞춰 '일단 날치기후 너네는 우리가 던져주는 거나 받아먹어라'라는 태도는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게 아니다'가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