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들의 일생은 비정하기 짝이 없지요.
권력을 누가 차지하냐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형과 동생이, 남편과 아내가 싸우고 심지어 서로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왕들은 많이 불행했을 것 같아요. 다들 결혼하고 자식을 두지만 그게 어디 제대로 된 가족일까 의문마저 들지요. 하지만 그런 편견에도 불구하고 임금들은 이 세상 여느 어버이가 그러하듯 자기의 자식들을 사랑했고 그래서 울고 웃었습니다.

 

전혀 안 어울리지만 태종도 자식을 이뻐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조선 초, 아직 정안군 이었을 때. 정도전에게 밀려 반쯤 실업자 신세 된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 숙청당할 지 모르니 큰아들은 외가에 맡겨놓고 둘째아들도 남에게 맡겼는데, 이 때 시름을 덜어준 게 갓 태어난 셋째 아들 막둥이었댑니다.
그래서 집에 오면 부인과 더불어 어린 아들 안고 둥기둥둥하며 마음의 짐을 덜었다지요.

당시 그의 집안 풍경을 상상해볼까요. 정안군이 "아빠 왔다~" 하고 대문을 들어서면 어린 아들이 엉금엉금 기어가서 아빠를 맞이하고, 아빠가 아들 안아서 비행기 놀이를 해주면 엄마는 그걸 보며 웃는...

어...?

이거 존내 훈훈한데요?... 왜 눈물이 나지?


그로부터 20년 쯤 뒤, 조선의 왕이 된 아버지는 셋째 아들 막둥... 세종에게 자리를 넘겨주죠. 그 때 했던 말이 이랬어요.

"얘, 옥새 받아가렴."

그 때만은 어린 아들을 안고 어르던 아빠로 돌아갔단 느낌이 들었어요. 바로 그 옥새, 권력을 잡기 위해 아버지를 몰아내고 동생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태종이었는데. 이제 그걸 선물을 주듯, 맛난 것을 주려는 듯이 선뜻 아들을 부르니까요. 아마 아들로서도 눈물이 핑 돌았을 거여요.

 

...그리고 난 다음 아빠는 아들의 처가를 작살내긴 했지만요.

 

이후로도 임금님들의 고슴고슴 자식사랑의 연원은 이어지게 되니...
유난히 자식들 예뻐한 게 중종입니다. 결혼해서 분가한 자식들에게 '지나치게' 훌륭한 집을 지어줘서 사치 문제에 국고 낭비로 잔소리도 들었으니까요. 그러다 출가한 자식들 찾아오면 그렇게 반겨했고(웬지 추석집 본가 분위기), 야사에서는 세자궁에서 불이 나고 세자가 나오지 않자 임금의 체면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맨발로 달려가 "백돌아, 백돌아!" 하고 울며 외쳤다죠.

 

그럴 만한 사람이어요. 딸 효정옹주에게도 그랬거든요. 옹주가 시집간 뒤 부마 조의정은 옹주를 구박하고 몸종 풍가이를 총애했다죠. 그러자 임금이 직접 나서서 사위를 혼내고 풍가이를 귀양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 옹주는 풍가이를 데려오게 했고, 그러다 아이를 낳다가 위급한 상황이 되었는데... 이 사위놈은 느적느적 대처해서 옹주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되자 중종은 당장 사위를 의금부에 쳐넣고 죽이니 살리니 펄펄 뛰었고, 말리러 온 신하들을 붙잡고 거하게 속풀이를 합니다, 우리 애가 얼마나 착하고 이뻤는데, 그런데 저 사위란 개객기놈이 구박을 했다, 내가 그렇게 혼 좀 내라고 했는데 울 애가 너무 착해서... 사위놈은 내 딸을 죽게 내버려두고 그 지집애와 함께 살겠다는 계획을 세운 거다, 도저히 못 참겠다 기타등등. 웬지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친정엄마가 할 법한 하소연을 주구장창 합니다.

 

아마 중종은 이야기하면서 울었을 거여요.
얼마나 슬프고 억울했겠어요.
착하디 착한 딸인데, 조금만 더 빨리 의사가 갔더라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구박만 받다가 세상 뜬 딸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을 거여요. 그리고 사위놈을 작신작신 때려주고 싶었겠죠. 아무리 그래도 임금 맘대로 나라의 법을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니, 곤장 때리고 귀양을 보내는 선으로 끝나지만...
인터넷에선 옹주가 못 생기고 풍가이가 절세미인이라는 전혀 근거없는 소문이 돌더군요. 아무래도 왕의 딸을 구박할 만큼 간땡이가 부은 조의정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서 그럴 겁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분명한 건 그 사위가 나쁜놈이라는 거죠. 실록의 사관은 옹주는 착하고 풍가이도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했으니...

 

그로부터 수백년 뒤인 1742년, 마흔 여덟의 영조는 학부형이 됩니다. 세자가 8살이 되어 성균관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이죠. 귀하디 귀한 아들의 입학식이다보니 영조는 힘이 빡! 들어가서 나라를 왈칵 뒤집어가며 준비를 합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를 스승으로 들이는 거야 당연하고, 선생에게 바치는 예물도 그냥 있는 거로는 안 된다며 전국 다 뒤져서 가장 좋은 물건을 준비해오게 하는 가 하면. 이제까지 그냥저냥 치러졌던 입학식이건만, 가장 멋있고 훌륭하게 치러야 한다며 학자들을 달달 볶아대고, 들러리로 오던 성균관 유생들에게 제복을 입혀야 한다며 무슨 옷이 좋겠느냐고 의논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마치 아이가 처음 초등학교 입학을 하게 되자 가방 사주고 옷 사주고 이리저리 방방 뛰는 초보 학부형 모습 그대로인데, 그렇게 준비하는 데만도 장장 1년 가까이 걸렸죠.

그렇게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입학한 아들이 사도세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좀 슬퍼지지만요.

 

사실 이 소재로는 아주아주 할 거리가 많은데 다 이야기하다보면 책이 한 권 나오는지라, 줄이고 줄이다보니 아쉬움이 많네요. 할 이야기 진짜 많아요. 참 애달프고도 가슴 미어지고,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게 부모고 자식인 듯 합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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