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1961년, 커피를 금지하라

2011.12.17 19:10

LH 조회 수:3825

 

커피를 싫어하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좋아하는 분들도 많이 있으시겠죠. 사람들이 대체 언제부터 이런 까맣고 동글동글한 씨앗을 물에 달여 마실 것을 생각해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각종 전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아랍사람들이 처음 먹기 시작했다죠.

이후 그걸 접한 많은 문명권의 사람들은 대체 저 게 뭔가, 하며 한 두 잔 맛보다가 그만 커피 없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커피의 노예들은 더 수많은 사람들을 커피의 마수에 빠뜨렸고, 많은 이들이 모닝 커피 점심 커피 저녁 커피하며 살았지요.

하지만 커피는 그냥 맛나서 먹는 것만은 아니었죠. 노동자들의 친구이자 혁명가들의 동무이기도 했거든요. 잠을 깨게 해서 일을 더 하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는 한편, 높으신 분들을 까고 세상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집결소가 커피 하우스였죠.
터키의 카웨가 그랬고, 파리의 커피하우스에는 불온분자 및 사회불만세력들이 득시글 거렸습니다. 그래서 커피는, 그리고 커피하우스 - 다방은 권력자들의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터키의 술탄은 카웨의 주인과 손님들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보스포러스 해협에 던져버렸고,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일이 있었죠.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건 미국대사를 통해서라고 추측됩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고종은 무척 커피를 좋아했지요. 이후 차츰 일반인들에게도 퍼졌으니... 1930년대 옛날 신문들에는 대체 어떻게 하면 커피를 맛있게 마실 수 있느냐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옷에 묻은 커피 얼룩을 잘 지우느냐를 놓고 깨알같이 이야기합니다. (별 거 없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다방 커피는 달걀 노른자가 들어갔다는 것. 커피에다가 설탕 넣고 크림 넣고, 여기다 달걀 노른자 퐁 넣어서 휘휘 저어주면 노른자가 슥 떠오르고 익기 전에 마시는 겁니다. 레지 누님들에게 잘 보이면 쌍알도 들어갔고, 가끔 병아리 되기 직전의 달걀도 있었다는 도시전설도 전해집니다.
어차피 터키 사람들도 용연향이나 온갖 기기괴괴한 것들을 퐁당퐁당 넣어먹었으니 그러려니 싶지만... 맛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만들어먹을 엄두는 안 납니다. 만들어먹은 뒤 절 원망하지 말아주세요.

 

헌데 1960년대 대통령님은 커피를 안 좋아했나 봅니다. 뭐 그런 씁쓸하고 들척지근한 외제 까만 물을 비싼 돈 주고 사먹냐 이거죠. 정작 본인은 외제 술 시바스 리갈을 좋아했지만, 원래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에는 관대해도 남의 입에는 야박한 법이니까요. 그렇게 되자 슬슬 언론 및 신문기사들이 바람을 잡습니다. 커피야 말로 망국의 병이라느니, 커피만 마시며 다방에서 죽치고 앉아 일도 안 하는 나태한 것들은 붕어라느니 하는 변죽을 둥둥둥 울렸지요.

 

그러드니만 급기야 1961년 5월 29일, 그러니까 5.16에서 딱 2주만에(...) 서울의 다방협회에서는 나라를 위해 커피를 안 팔겠다는 조낸 애국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양담배도 안 파는데 어떻게 수입산 커피를 팔 수 있겠느냐, 정부의 외압은 없었지만 자기들이 직접 결정했다고...

 

"커피를 절약하면 우리나라 자동차의 질 향상 및 보급에 도움이 될 거여요 ^^"

 

라는 진짜 지랄같은 관제보도 같은 발표까지 합니다.
어째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 말이죠. 기분 탓이지만.

 

그렇다고 커피 없는 다방이라니! ...아, 물론 차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당시 다방의 매출 절반이 커피였는데 어떻게 안 팔고 봅니까. 그리고 사실 홍차도 수입품이었기에 금지되었습니다. 그 다음이야 뻔하죠. 수많은 다방들이 금지된 커피를 팔다가 단속에 걸립니다.

하여 불과 몇 달만에 혁명(...)정부는 본색을 드러내고 커피를 파는 다방들을 하루에도 수백 곳 적발해대고, 또 커피를 팔면 영업정지 시키고 재판에 회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습니다. 실제로 한 달간 영업정지 시켰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국내산 커피가 어디있습니까. 콩 볶아다가 민들레 뿌리, 오미자 섞어서 콩피라는 짝퉁 커피를 팔기도 했지만 커피 중독자로서는 그게 성이 찰 리가 있나요. 뭣보다 맛이 없었댑니다.

다방 주인들도 이렇게 못 살 거 같으니까 행정소송을 걸었습니다만, 당시가 어느 시댑니까. 판사는 "외국산 커피를 팔면 풍기가 문란해진다." 라는 창의력 대장인 판결을 내려 버립니다. 뭐, 윗 분 눈치 본 거죠. 많은 다방들이 매상이 떨어지고 후드득 문을 닫습니다.

 

당시 커피를 마시려면 단골 가게 가서 레지에게 살며시 속삭이며 커피를 달라고 해야 했다죠. 뜨내기 손님은 절대로 안 줬답니다. 하여 단속은 치열해지고 커피를 은닉했다는 죄로 다방 마담들이 줄줄이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층에 다방이 있었는데, 경찰이 단속을 나와서 다방에서 손님들이 마시고 있는 게 외래산 커피라고 하니까 주인이 재빠르게 달려가 커피를 뒤엎어버리고 달아나다가... 떨어져서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죠.

 

...이게 뭐 불온서적이나 세상의 기밀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어이가 행방불명 되는 사태였지요.

 

사실 이 모든 조치는 5.16 이래 혁명정부가 나라의 경제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외래품을 팔지 못하게 한다는 외래품판금의 일환이었습니다. 커피 뿐만이 아니라 과일, 과자, 직물, 그릇, 금속, 의약, 고무, 레인코트나 속옷, 악기, 문방구, 라디오, 사진기, 축음기, 화장품 등등 하여간 다 안 된다는 조치였지요. 당시 수입금지 물품 목록을 보면 렛츠 고 원시시대입니다. 당시 그 대부분의 물건들이 국내 생산이 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죠.
당시 신문에서는 우리는 외래산 커피보다 국내산 오미자차나 생강차를 마셔요! ^^ 커피를 안 마시게 되니 하루에 7천 달러씩 벌고 있어요! 커피가 물러가니 절약이 쌓여요! 라는 지랄 옆차기 같고 울트라 빅엿같은 기사를 수다하게 냈지만, 아시잖습니까. 이 상황 진짜 아니다 싶은 것. 게다가 한 번 커피의 노예는 영원한 커피의 노예입니다. 이러느니 커피를 맘대로 마실 수 있는 브라질로 이민가겠다는 말 마저 나오는 상황이었으니 오죽합니까.

 

해서 1963년이 되면 사람들은 슬금슬금 자연스럽게 커피들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물가 안정 차원에서 커피값을 내리게 하거나, 콜레라가 돈다고 아이스커피를 팔지 못하게 할 뿐. 커피는 다들 마시는 것이 되었으며... 64년에는 다시 정식으로 수입품목이 됩니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이 외래산 국물을 반겼고... 아직까지도 이 음료는 제 컴 모니터 옆에 자리하여 "언제 날 마실거유?" 라는 듯이 기다리고 있네요.

 

사실 나이 든 어르신들이 박통 때가 참 좋았다 어쩐다 회상하시는 걸 보면.
맘대로 커피 마실 수 없었던 건 기억나시느냐고 살짝 묻고 싶어집니다. 커피 아니라 코코아도 홍차도, 주스도 마실 수 없었어요 그 땐.
뭐, 과거는 다 그렇게 미화되기 마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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