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담] 친일의 스펙트럼

2011.12.21 19:25

LH 조회 수:1832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줍니다.
어떤 답을 선택하느냐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 역시 개인의 몫이죠. 이를테면 수능시험이나 마찬가지여요. 시험에서 답을 쓰는 것까지 좋은 데 그게 정답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나중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적표 받고 울든 웃든 그건 자기 몫이지요.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처음에는  미개한 조선을 깨우치겠다는 '좋은' 의도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긍지를 가지고, 불쌍한 다른 아시아 사람들을 개발해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시궁창. 일제는 근대화 정책을 시행하다가 잘 안 되면 미개한 조선인 탓으로 돌리고 쥐잡듯이 잡았습니다.
이건 전봉관 선생님의 경성기담을 봐도 좋을 거여요. 사건 수사를 근대화적으로 하려다가 잘 안 되니 일단 무작정 잡아다 고문하고 기타등등이 되었지요.
특히 태평양 전쟁 말기, 그러니 패전으로 치닫던 즈음 일제가 얼마나 미쳐 돌아갔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식민지 수탈이 그냥 수탈이 아니니까요.

 

친일파 역시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으니... 물론 자기만의 영달을 위해 친일한 사람도 있긴 하죠. 이완용이라던가 송병준이라던가. 그런데 한편으론 전략적인 친일을 한 사람도 찾아보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인에게 극심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내선일체 어쩌고 하던 일본정부도 전쟁이 궁지에 몰리면서 조선인들을 차별, 학대했지요. 그게 아니더라도 조선인들은 계속 2류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고 - 그래서 친일파들은 더욱, 열성적으로 친일을 합니다. 일본인 보다 더 한 일본인이 되어 주류가 되려고 한 거죠.

친일파들이 회고한 것을 보면, 자신들이 이렇게 열심히 활동을 하면 언젠가 조선인들이 일본인처럼 동등하게 대우받을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을 위해 열심히 싸워주면 인정받지 않겠느냐는, 그런 진짜 순진해 나자빠진 생각들을 한 겁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서라고, 정신대로 나가라고 독려한 겁니다.
다 좋은데... 그렇게 나간 사람들이 어찌되었는가를 생각하면. 또 그렇게 독려한 사람들의 자식들이 전쟁에 나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론 생계형 친일도 찾아보면 있겠네요.
말 그대로 먹고사니즘 때문에 친일한 사람들? 윤치호도 처음엔 이쪽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당시 친일파와 독립투사들의 다양한(-_-) 스펙트럼을 볼 수 있는데, 정말 악질 친일파가 있었나 하면 독립운동한다는 빌미로 여기저기 돈 뜯고 다니는 뜨내기 건달 독립투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윤치호는 내 가족이 소중하니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겠죠.

 

친일파를 논의할 때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적이지 않느냐라고 하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당시의 상황 때문에 친일을 했다라는 게 더 감정적인 주장이자 막스 베버적으로 책임윤리와 심정윤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랄 수 있겠습니다.

철학 이야긴 어려우니까 좀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변명들은 조봉암 선생의 이야기 하나로 갈파가 되어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구질구질 변명하는 것보다 훨씬 멋있는 간지폭풍입니다.

 

사실 친일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다, 라고는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안위를 추구했다는 겁니다. 자신, 그리고 자기 가족들을 위해. 거 왜, 임진왜란 때도 많은 벼슬아치들이 임금과 백성을 버리고 가족만 챙겨 달아났으니까요.
가족이 소중하지 않은, 자기가 소중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있겠습니까. 유관순 누나는 뭐 자기 목숨이 아깝지 않아서 이팔청춘에 감옥에서 맞아죽었겠어요? 이시영 선생은 왜 재산 탈탈 털어 만주로 갔고, 자식들이 벌판에서 굶어 죽어갔겠어요.

 

어느 시대나 역사의 한계라는 게 있습니다.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돈다고 믿는다거나, 사람이 평등하지 않다거나, 당대에서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지금에서 보면 더 없는 편견이나 선입견이 되는 것 말입니다.
최만리는 당시 기준으로 당연한 진실을 이야기하며 한글을 반대했습니다.
세종은 무려 천민출신을 기용했고, 정조는 서자들을 데려다 규장각에서 일하게 합니다. 당시론 미친 짓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친일파 문제는 대단히 어렵지만, 앞으로도 계속 논의가 되고 토론이 벌어져야 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채 파묻힌 일은 언제고 반드시 썩어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나라가 위기에 처해도 독립운동 하느라 패가망신하기보다는 사회에 순응해서 권세에 잘 들러붙어서 살면 명망가가 된다라고 가르치는 것일 수도 있단 말입니다.
.

p.s : 사실 친일만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 이후 김순흥 씨의 행보에 더 흥미가 갑니다. 육영재단에 큰 돈을 기부했다는 말인즉, 일제시대 이후 자유당과도 긴밀하게 지냈기에 반민특위를 무사히 넘겼고, 그런 이후 군사정부와도 긴밀한 사이였다는 말이지요. 추측이긴 하지만, 당시 정계와 유착 없이 순수하게 부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 지 상당히 의심스럽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윤치호가 그렇게 지독한 친일파라고 까댔던 신흥우가 민족운동가로 떡하니 백과사전에 떡 하니 실려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선합니다. 그는 그렇게 친일 해대고도 나중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댔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07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62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543
85815 한번도 안써봤을거 같은 키보드 기호 [9] 가끔영화 2011.12.21 2212
85814 절판된 SF 소설 웃돈주고 사고파는 건 여전하군요. [7] dl 2011.12.21 2249
85813 급질. 상 당하신 윗어른께 문자로 보낼 인삿말.. [8] bebijang 2011.12.21 6659
85812 인턴 합격 했습니다. ㅠ (터미널쪽이나 강남근처 찜질방 질문) [3] 지루박 2011.12.21 2841
85811 [펌] 지미 카터 횽아의 참 쉽죠? [7] 01410 2011.12.21 2528
» [역사 잡담] 친일의 스펙트럼 [1] LH 2011.12.21 1832
85809 [역사 야그] 암행어사 출도야! [10] LH 2011.12.21 3016
85808 통일부의 노무현 재단 방북 반대 이유가 좀 웃기네요... [2] 마당 2011.12.21 1675
85807 오늘 하이킥.. [9] DJUNA 2011.12.21 1488
85806 [듀나인]어른이 된다는 것 2 [3] 어른아이 2011.12.21 1222
85805 아주 아주 기분 나쁜 기사 [4] amenic 2011.12.21 2454
85804 스칼렛 요한슨,제시카 알바, 아드리아나 리마, 민카 켈리의 공통점은? [10] 자본주의의돼지 2011.12.21 30666
85803 채널CGV의 고약한(?) 센스 [4] 사과씨 2011.12.21 2142
85802 [조금 긴 바낭] 민족주의와 친일의 문제 [25] 푸네스 2011.12.21 2330
85801 장동건은 기자들이 사랑하는 배우일까요... [7] 아름다운나타샤 2011.12.21 3323
85800 추억은 방울방울 쿨타임이군요. 제가 좋아했던 로봇 애니메이션. [22] 자본주의의돼지 2011.12.21 1694
85799 [DjunaiN] 판교에서 KTX 승차역으로 가려고 합니다. [6] Weisserose 2011.12.21 4130
85798 대한민국 자식연합 제작 동영상 : D-1 (부제.약은 약사에게 깔때기는 정봉주에게) [7] 라곱순 2011.12.21 1593
85797 내년 3월경 신혼 여행지 추천 부탁드립니다. [17] 은밀한 생 2011.12.21 2847
85796 '첫사랑'의 느낌을 잘 표현한 작품 [27] 도니다코 2011.12.21 358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