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암행어사 출도야!

2011.12.21 19:32

LH 조회 수:3016

옛날 게시판 글 재탕입니다. 조금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춘향전의 백미는 역시나 암행어사 출두지요.
옛날 드라마에서 춘향이 주변을 망나니가 돌며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마패가 하늘로 불쑥 솟구치며 우렁찬 목소리가 들립니다. 암행어사 출두요! 그리하여 거지꼴이던 어사는 단정한 관복을 입고 백성들 등 쳐먹는 탐관오리들에게 철퇴를 내립니다.

참 재미있는 제도이지요. 로망도 있고. 다른 말로 수의(繡衣)라고도 했으니, 임금에게 비밀리에 명령을 받아 거지꼴로 꾸미고 지방에 파견되어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살피고 지방 관리들의 상황을 다이렉트로 알리는 임무가 있었고, 때로 중앙 정부의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는 지 역시 감찰했습니다.

 

사실 이 암행어사야 말로 전래동화에 자주 나오곤 하는 지상 최대의 전투종족 - 지나가던 선비의 원조격이랄 수 있죠. 마패 들고 출도를 외치면 천하무적이니 말입니다. 물론 이무기라던가 도깨비까지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각지에서 발견되는 암행어사 민담(주로 박문수가 주인공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바램을 형상화한 것이지요.

실제로 조선말엽이 되면 지방관리들의 부정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조만영이란 암행어사는 출두한 뒤 일단 아전을 잡아 족쳤는데, 그 죄를 입증할 증거가 분명하지 않음에도 - 백성들이 모두 어사님 짱이심을 외쳤답니다. 그 정도로 다들 해먹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으 종갓집 22대손 정조님하는 "백성이 오매불망 바라는 것은 어사 뿐이고, 관리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어사 뿐이다." 라고 했지요. 뭐 잘 보면 부정부패에 일 그르치는 어사들도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마지막 양심의 보루였달까 희망이랄까 그랬습니다.

 

보통 암행어사는 임금이 직접 몇몇 신하를 골라 봉서를 내리면서 결정됩니다. 단단히 봉해진 편지에는 가야할 지역과 살펴야 할 내용, 그리고 주의사항 등이 적혀있지요. 이를테면 마패는 아무때나 쓰지 말고 출도할 때만 써라 등등.
원칙적으로 암행어사는 명령을 받은 즉시 떠나 사대문 밖으로 나간 뒤 봉서를 뜯고 가야할 곳을 알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행짐도 챙겨야 하고, 가족들에게 인사도 해야 하고, 교통편도 알아봐야 하고 그러다보니 한참 꾸물거린 다음에야 떠났지요.

그러니 어사가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이 짜- 하게 퍼져 있었댑니다. 특히 어느 고을에라도 출도를 하게 되면 어사가 다닌다는 소문은 더욱 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지방의 수령들은 대비(?)를 하게 됩니다. 그걸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 어사는 죽어라 빨리 돌아다닙니다. 하룻밤에 100리를 주파한 어사도 있었댑니다. 과로사한 암행어사가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죠.
정약용도 정조에게 명령을 받아 경기도의 암행어사로 나선 적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죽도록 걸었는데 고작 40리 갔다고 오티엘 친 글을 쓴 적도 있지요. 결국 암행어사에게는 체력 및 달리기 실력이 필수였던 셈입니다.

 

이렇게 돌아다니는데... 당연히 변장을 하죠. 일부러 낡은 옷을 입고 장사치 흉내도 내고, 천민들 사이에 끼어들기도 하고, 거지들에게 주는 급식을 받아먹기도 하고. 정약용도 엄청 배가 고팠다고 하더군요.

암행어사의 체험을 술회한 가장 유명한 기록들은 박만정의 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와 박내겸의 서수일기(西繡日記)를 꼽을 수 있겠네요. 이중 박내겸 아저씨는 꽤 재미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 일기는 깨알같이 즐겁습니다.

 

우선 변장을 하고 다니면서 장사치들,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다녔는데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소문이 퍼져있드랩니다. 사람들이 누굴까? 누굴까? 하며 온갖 유언비어를 이야기하는 걸 듣는 박내겸의 입은 귓가에 걸려 있지 않았을까요. 그걸 들으며 마음 속으로 암행어사 여기 있지롱 하고 외쳤겠죠.

그러나 이런 그의 즐거운 암행도 특정인물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으니... 기생들이 그렇게 족집게였댑니다. 아래 위로 척 보고 "어르신 보통 사람 아니죠?" 하고 말해서 화들짝 놀란 나머지 튀기까지 했답니다. 왜 그리 잘 알았을까요. 워낙 많은 사람들을 겪어보고 또 여자의 감이 날카로워서 그랬는지도요.

그래도 이렇게 뽀록날 뻔한 위험은 애들 장난이었으니, 가짜 어사로 의심을 받아 고초를 겪는 일도 있었습니다. 암행어사 박내겸이 부하들은 다른 데 보내고 혼자 언덕배기에 쉬고 있자니, 포졸 한 사람이 와서 이것저것 캐물었댑니다.

 

"요 근래 가짜 어사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나쁜 짓을 하거든? 그래설라무네 이 몸께서 여기저기 수사를 하고 있는데 말이지... 형씨에게서 좀 수상한 스멜이 나네?"

 

그러면서 자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빨간 밧줄을 보여주면서 이리 말했다더군요.

 

"이게 뭐↗게~? ^ㅅ^"

 

뭐 여차하면 잡아넣겠다 하고 겁주는 거였죠. 그래서 암행어사님도 품의 마패를 살며시 꺼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이게 뭐↗게~?  ^ㅅ^"

 

그 순간, 이 포졸 아저씨. 얼굴이 누렇게 뜨고 입이 오징어처럼 오그라들더니  데굴데굴 언덕 밑으로 굴러가서 평지에 이르러서 멈췄댑니다. 마패의 새로운 효능은 사람을 축구공으로 바꾸는 것이려나요. 그러자 이 암행어사는 포졸을 손수 일으켜 주고 이리 말했답니다.

 

"너 님 공무원 나 님 공무원. 다 같이 열심히 나라 일 하면 좋은 거지?"

 

그러면서 딴 데 가서 발설마라 토닥토닥 부비부비를 하며 돌려보냈는데, 이것만 보면 훈훈하고 감동적일 것 같지만 그래놓고서 "짱 유쾌했음"- 이라고 감상을 적어둔 걸 보니 이 어사도 성격 어지간히 나쁜 듯 합니다. 아니 애초에 그 자리에서 마패를 꺼내들 걸 생각한 거 부터가 이미...

이 분이 나중에 출도 할 때의 감상을 적었는데,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이 따로 없더군요. 산이 뒤집히고 밀물처럼 쏟아지는 것 마냥 사람이랑 말이랑 사방팔방으로 파르르 달아나고, 장날인데도 쥐새끼 한 마리 없고 관청에도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이 텅 빈 걸 보면서 "여기 온 이래 젤 멋진 광경이었듬."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이 아저씨가 암행을 간 곳이 어디냐 하면 바로 산 좋고 물 좋기로 으뜸가는 평안도.
그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출도 때가 좋았다 하니 뭐랄까 암행하는 와중의 온갖 고생과 스트레스가 짜- 하게 풀리는 순간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래전 암행어사로 드라마가 만들어진 것으로 아는데, 요즘도 하나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아유, 소재가 얼마나 무궁무진한데요.

 

...참, 암행어사 출두인지 출도인지 왔다갔다 합니다.

 

p.s : 여행 다녀옵니다.
엄청 강행군이니 다녀와서 뻗을 듯 하네요.
한 일주일 내지 열흘 뒤에 뵈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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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소심을 모토로 하는 역사쟁이의 짜투리 역사입니다.

오타/오류난무합니다. 지적은 언제나 감사히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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