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역사 잡담] 대통령의 영애

2012.01.11 18:30

LH 조회 수:3651


오늘은 딱히 글이라기 보단 잡담을 하죠. 한참 유신통치가 끗발을 날리고 있던 1977년도 신년 특집으로 "대통령 영애 박근혜 양과 함께"라는 프로그램이 MBC에 방송이 되었습니다. 당시 잘 나가던 아나운서 임택근 씨가 사회를 보고, 근혜씨가 텔레비젼에 나와 인터뷰를 했지요. 꽤 내용이 길긴 했는데 읽어볼만 했고... 인상 깊은 대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국토에 대해 손바닥 들여다보시는 것처럼 아세요. 저 마을에는 몇달 전에 큰 나무가 다섯 그루 있었는데 이제 세 그루 밖에 없다고 하세요."

 

그리고 차분한 음성으로 자상하게(신문 표현)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했는데 뭐 영세민 무료 진료라던가 고속도로 곳곳과 새마을 운동 상을 받은 마을을 하나하나 꿰고 있는 아버님의 자랑이라던지. 또, 딸인 자신은 '청와대의 야당'으로서 아버지께 조언을 드린다고.

 

"안타까와 이야기도 드리지만 어떤 것은 제가 잘못 알고 그런 것도 있어요. 아버지께서 설명해주면 괜히 쓸데없이 걱정을 했었구나 생각해요."

 

이런 문답도 있더군요.

 

"대통령께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성에 관해서까지 생활형편을 소상히 알고 계신데 이것은 영애께서 자주 아버님께 건의를 드리기 때문이 아닙니까?"

"제가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기도 하지만 아버지께서 산업전선에 일하는 여성들에 대해 상당히 관심이 깊으세요."

 

그리고 가족이 함께 배드민턴을 치는 화목한 가정의 이야기와 더불어, 돌아가신 어머니께의 그리움. 뭐 이거야 사람다운 일입니다만.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이런 거였네요.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어떤 지도자상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어떤 단체의 지도자는 자기자신이 인격적으로 깨끗하고 흠이 없어야 될 뿐 아니라 직원에게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제시해주고 직원의 어려운 점을 가장과 같은 마음으로 소상하게 돌봐주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옳은 말이지요.
그리고 다음 기사를 보니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육영수 씨가 별세한 지 10일 남짓 되었을 때 쯤에 육영수여사컵쟁탈 어머니 배구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대회 이름이 이상하다 싶지만 그 땐 그랬습니다. 여기에 영애 근혜씨가 참가했는데, 기사 내용은 이제 갓 20대가 된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게 아니었어요.

 

어머니를 닮은 잔잔한 미소라던가.
시종 따듯한 미소를 입가에 띈 채 위엄을 잃지 않았다던가...
인터뷰 하는 장소는 육영수 여사의 초상화 아래이거나 합니다.

 

확실히 그녀는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해서 하와이에 가기도 하고, 연설을 하거나 대통령의 메시지를 대독하기도 하고. 교포나 외교 사절단을 접견하기도 하고, 고아원이나 병원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연말에는 텔레비젼에서 국민에게 전하는 송년 메시지를 말하기도 했고, 아버지가 얼마나 나라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는 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지요.
하여간 1970년대의 감성이란 역시 저에게 너무 강하더군요. 읽기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좀더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그런 다음에야 이야기할 수 있을 법 합니다.

 

그런데 오노 후유미 원작의 12국기란 소설을 아시는지요. 거기에 쇼케이라는 전직 공주님이 나옵니다.  팔자가 참 사나운 아가씨였지요. 원래 그녀의 아버지는 도덕적으로 완벽해지고자 하는 결벽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크든 작든 모든 죄 지은 사람을 마구 처형해대며 나라가 어지러워집니다. 하지만 딸인 쇼케이는 정말 세상의 더러움일랑 하나도 모른 채 호사스럽게 살았죠. 애니메이션에서는 반짝반짝하게 차려입은 쇼케이가 시방가(偲芳歌)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가사를 조금 따오자면 이랬습니다.

 

내 귀여운 인형, 멋진 옷을 입히자. 반짝반짝 금으로 된 비녀, 행복을 줄께.
... (중략)
은혜 가득한 풍족한 나라, 꽃이 피어나고 길거리에서는 들린다, 기쁨의 노랫소리가.

 

하지만 쇼케이가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백성들은 죄 같지도 않은 죄로 수없이 처형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반란이 일어나 부모님은 모두 살해당하고 쇼케이는 거리에 나앉게 됩니다. 그렇지만 잘 살았던 그 때를 못 잊어 죄다 남 탓하며 여기저기 민폐 끼치고 다닙니다만...
그런데 차츰 바뀌게 되죠. 그 전까지 죄 있는 사람 벌 주는 게 뭐 어때서? 울 아빠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그랬던 거야! 말했던 쇼케이였지만... 처참하게 처형당하는 사람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처형인에게 돌을 던지죠.
그 이후 쇼케이는 아버지에게 처형당했던 백성들의 가족들 손에 잡혀 죽을 뻔도 하고, 이-렇고 저-런 과정을 통해 구르고 구르고 구르다가, 라크슌 보살을 만나 깨달음을 얻게 되고 환골탈태합니다.

 

저는 꽤 좋아합니다.
...라크슌을. (진지)

 

물론, 박근혜 씨는 쇼케이가 아닙니다. 여러 모로 아주 다르죠.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제 어머니께서는 "걔는 어째 그 어릴 때 부터 지금까지 엄마 헤어스타일 고대로냐?"하십니다. 처음 들었을 때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에이, 그래도 한참 어릴 때도 같은 머리모양이겠어... 생각하고 1977년도 신문의 사진을 봤더니.

 

엄마야.
진짜 똑같네.

 

제가 아는 여성분들은 어떻게 여자가 맨날 똑같은 머리모양을 할 수 있냐며 여자가 그럴 순 없다고 성토하더군요. 허나 그건 프로파간다이니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겠지요. 실제로 1988년 인터뷰를 한 걸 보면 언제 단발을 한 적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원래대로 바꾸라고 강력하게 요구해서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머리 모양 조차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며 웃었다네요.

 

이건 뱀발입니다. 박근혜씨는 1975년 뉴욕타임즈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와 정치 이야기를 하느냐,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더군요. "아버지는 이것저것 이야기하시지만 저는 듣기만 할 뿐, 정치는 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뭐 30년 넘게 지났으니 그 때와 지금이 같으리란 법은 없지요. 그러면서도 가끔 박근혜씨는 아직도 197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긴 합니다.

 

http://www.facebook.com/historyminst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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