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다들 설빔이라던지, 떡국이라던지, 한 살 더 먹어가는 슬픔이라던지(?) 또는 친척어른들에게 결혼해라라던가 취직하라는 잔소리를 듣는 날이겠거니 하겠지만.
그래도 어린시절 그런 즐거움은 있었지요.
친척어른들에게 세뱃돈이란 이름의 용돈을 수거하는 것 말입니다.
물론 그런 돈들은 대부분 손을 스치고 지나가 옆구리 찌르는 부모님께 넘어가 언젠가 돌아온다는 기약을 어기고 행방불명되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엄연한 노동의 댓가로 빳빳한 새돈을 받아 챙기는 즐거움은 쏠쏠했습니다.

 

세배의 풍습이란 대개 먼 옛날부터 있긴 했습니다. 섣달 그믐에 인사를 하는 것은 과세(過歲)라고 했고 첫날 인사하는 것은 세배(歲拜)라고 했지요. 아이들은 새옷을 입고 낮에는 연날리고 밤에는 윷놀이를 해댔습니다. 부인들은 직접 친정에 가기도 했습니다. 사대부의 집에서는 부인이 직접 친정에 가지 않고 하녀를 보내어 문안을 여쭈었다곤 하지만, 이덕무가 쓴 시를 보면 부인은 친정에 가고 자기 혼자 집 지키는 대목도 나오더라고요. 떡국이야 정조 때는 확실히 먹었습니다. 한자로는 탕병이라고 쓰는데, 이건 때로 뜨거운 국수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세배의 댓가로 절값을 주는 게 얼마나 오래전 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집안 친척들 빙 둘러가며, 또 마을의 큰 어른들에게, 또 관리라면 윗사람에게 세배를 하고나면 음식과 술을 내주는 게 관습이긴 했습니다. 또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 등지에도 세뱃돈이 있으니 딱히 우리나라만의 풍습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1920년대 서울 근방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모양입니다. 1920년대 후반의 신문에서는 "아희들에게 절값을 주지 말자"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돈 주는 게 나쁘다면서, 만약 아이가 받아오면 준 어른께 돌려주자는 권유도 하더군요. 세뱃돈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이걸로 뭐 맛난 거 사묵으라"(...)는 것. 당시 세뱃돈은 동전이었지요. 반짝반짝 빛나는 백동화폐. 1920년대 즈음에는 5푼이 기본 시세였는데, 하루 종일 세배를 뛰면(...) 20배, 즉 100푼 정도를 모을 수 있었댑니다.
다만 세배를 받는 것은 소학교 입학 전까지만. 즉 7살이 넘어가면 받지 못했댑니다.


아이들은 그 돈으로 당연히 군것질을 해댔습니다. 그 외에는 장난감으로 딱총, 팽이를 사댔고, 알록달록 고무풍선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 날은 구멍가게와 노점상의 대목이었지요. 한편 벙어리 저금통에 한 푼 두 푼 고이고이 모아두어서 스케이트를 사겠다는 야망을 불태우는 아이도 있었지요.
그런 귀한 세뱃돈을 모으고 모아 불우이웃이나 친구를 돕기 위해 내는 기특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당연하지만 세배를 갔다가 세뱃돈 안 준다고 울며 떼쓰는 아이도 있었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배금사상(헑) 및 금전욕(헑2)을 부추긴다고 돈을 주지 말자고 했습니다만, 1950년대의 교과서에는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나눠주는 이승만 대통령의 삽화가 실릴 정도로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덧붙여 이기붕 씨의 부인 박마리아는 아이들에게 주는 세뱃돈을 백 환짜리를 꼭 거슬러와서 십 환만 나눠주는 구두쇠 본성으로 주변에 욕 좀 들어먹었습니다. 그 말을 보면 1960년대 세뱃돈 평균은 백 환 쯤이었다는 이야기죠. 물론 처지나 상황에 따라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을 겁니다, 당연히. 미안하지만 그 때 돈 가치가 얼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잘 아시는 대로, 화폐개혁이 일어나게 되죠.
1970년 때의 세뱃돈 적정가는 10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경쟁이 붙기도 했습니다. 사립학교 부유층 엄마들은 너무 많은 돈을 세뱃돈으로 주고 받아대기도 하고, 상사의 자식들에게 주는 세뱃돈이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바치기도 하고. 해서 당시 심리학을 전공하는 어떤 교수님은 세뱃돈의 액수를 정하기도 했으니.

 

7살 미만 : 50원
초등학생 : 100원
중고등학생 : 100~200원까지

 

그러나 1980년이 되면 새싹회 회장 윤석중 씨의 말에 따르면, 적게 받는 애는 500원, 정말로 많이 받은 아이는 5천원을 받았다더군요. 즉, 적정 세뱃돈은 천원 남짓이었습니다.

 

90년대가 되면 드디어! 대학생은 5천원에서 1만원 즈음을, 그 아래 학생들은 1천원에서 3천원까지 받았습니다. 자 이제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차곡차곡 옛날 생각들이 나게 될 겁니다. 내가 얼마 받았지? 하는 셈도 시작하겠지요.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 모든 액수는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습니다. 초등학생에게 세뱃돈으로 만원을 주는 건 너무하다며 질타하는 기사까지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어떤 초등 2년은 세뱃돈으로 13만원을 받았다는 자랑 인증을 하기도 했습니다. 뭐 그렇다 해도 어느 두족류를 닮은 전 대통령의 천만원 세뱃돈에 비하면야 적은 액수이겠습니다만.
이 당시 세뱃돈 상한선은 20살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92년도에 동양어패럴이 "20살이 넘어도 세뱃돈 주세요! 우리 와이셔츠로..." 하는 광고를 냈거든요.
이 즈음 되면 아이들은 세뱃돈으로 전자오락기, 그리고 게임 프로그램을 사댔습니다. 용산, 세운상가와 그레이스 백화점의 컴퓨터 랜드 등등이 북새통을 이뤘지요. 조금 지나면 삐삐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90년대 후반에는 초등학생에게는 3~5천원, 중고생에게는 만원, 대학생에게는 2~3만원 쭝이 됩니다. 하지만 IMF가 몰아닥치면서 세뱃돈 경기에도 한파가 몰아닥쳤으니... 5천원으로 따운이 되어 많은 아이들이 입술을 불룩 불룩 내밀게 되었지요. 이왕 적게 주는 거 부피라도 많으라고(...) 천원 짜리로 바꿔 줬기 때문에 갑자기 새 천원권이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자 가나안인 세뱃돈인데요. 불과 2년여만인 99년에는 다시 만원 짜리가 세뱃돈의 왕좌 자리를 탈환합니다. 이후로 만원, 2만원 쭝이 되고 여러 분들이 기억하는 그 액수가 될 겁니다. 이제 5만원짜리 신권이 나왔으니 새 판도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언제나 많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배를 당하고 돈을 뜯기게 되면서 아, 세뱃돈이 워낙 이런 뜻이 아닌데 잘못 전해지고 있다며, 우리 땐 안 그랬어! 우린 작은 동전 하나만 들려줘도 좋아라 했고 덕담을 듣는 게 훨씬 더 좋았다고! 그러면서우리네 유서 깊은 전통을 되살리겠다며, 세뱃돈으로 뭘 사기 보단 학용품을 사거나 불우이웃을 돕는 게 좋다고 호기롭게 말하긴 했는데... 이거야 뭐 개구리가 올챙잇적 기억 못하는 시추에이션입죠.


본디 세뱃돈이란 주는 입장과 받는 입장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런 글을 쓴 사람들도 틀림없이 어릴 때는 세뱃돈 받는 즉시 가게로 달려갔을 거늘. 세뱃돈을 좋은 데 써야 한다는 주장은 1920년대부터, 그리고 현금보다는 상품권을 주는 게 좋다는 말은 80년대서부터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실행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이번 설날, 과연 얼마의 세뱃돈을 주고 받게 되려나요. 받는 분들은 열심히 하셔서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십시오. 그리고 주는 분들도 나름, 어릴 때 받은 거 되돌린다 생각하고 주시되 너무 무리는 마십시오. 지금 받아가는 애들도 언젠가 주는 처지가 될테니 말여요.

 

그럼 모두 즐거운 설날 되세요.

 

p.s : 여전히 감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코가 막히니 집중이 참 안 되네요. 쿨럭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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