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연휴 전날까지 일을 했고 겨우 원고료를 받아서 
시장에 들렀어요. (저는 번역을 합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원고료를 받아 고양이를 샀다던데 
제게는 이미 고양이가 있기 때문에 
대신 연휴 전날이라 싸게 파는 백합을 세 줄기 샀습니다. 
줄기가 푸르고 단단하고 아주 향기로워요. 
국내산 생표고버섯도 한 근 샀지요. 
저의 작고 무절제한 살림살이 속에서
생표고를 사느냐 마느냐는 언제나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드디어 중국산 건표고 한 봉지가 동났기 때문에 
생표고를 살 수 있었지요, 저울의 눈금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더니
친절한 재래시장 상인이 두 개 더 넣어 주었어요. 
남은 돈으로는 누진세 적용으로 인하여 
전월의 여섯 배가 나온 전기료를 내야 합니다;;
생각하니 억울하고 고통스럽군요;;

집에 돌아와 우선 표고버섯의 기둥과 갓을 분리해 다듬고
커다란 양파를 하나 다 썰고, 얼려두었던 대파 잎, 
다시마를 넣고선 부글부글 끓입니다. 
물이 삼분의 일 쯤 줄어들 때까지 끓이면
아주 좋은 채소 육수가 만들어집니다. 
아니 뭐 더 훌륭한 레서피가 있겠지만
이건 제 최선의 육수예요 아주 맛있습니다. 
간은 따로 하지 않습니다, 만두는 짜니까요...

육수 야채를 건진 다음 표고 갓 부분은 가늘게 썰어서 다시 넣습니다. 
시장에서 사온 떡과 만두를 우르르 쏟아넣고 익힌 다음에
신선한 계란을 풀어서 핸드드립.
자기 입에 맞는 음식을 자기 손으로 만들 수 있게 되기까지
아주 긴 고행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입맛이 하락한 건지도)
요리는 정말 좋은 거예요. 그건 천천히 행복해지는 방법들 중 하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컵라면 따위를 삼키다가 
사레가 들려 캑캑거리는 한 주를 보내는 동안 
일이 끝나면 뭘 해 먹을까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올해의 목표 중 하나는 화려한 손님초대요리 열 가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들은 동파육... 뭐 이런 걸 하던데...
으음 요리하는 인간이라면 
동파육... 뭐 이런 것도 만들 줄 알아야... 
그리고 생선 손질을 익히고 싶어요.  
그밖에는 열 개의 국내도시에 놀러가고 싶습니다.
작년에는 다섯 군데 다녀왔어요. 
강원도에 별로 가본 적이 없어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2. 오늘 아침의 아주 행복한 기분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저는 아직도 저를 위해 꽃을 사는 사람인데 
정돈되어 있지 않고 고정된 수입도 없는 사람이 
꽃에 돈을 지불해도 되는가 같은 고민을 자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민은 꽃을 꽂아논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깰 때 사라지지요.
늦잠 자는 사람이지만 지난 한 주간 일곱 시 알람에 벌떡 일어났더니
오늘은 알람이 없는데도 화들짝 깼어요.
창이 동쪽으로 나 있어서 아침 해가 일찍 듭니다.
일어나자마자 백합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어요. 
탁자 위에는 어제 먹던 귤이 빛나게 쌓여 있고 가스렌지 위에는
엄청나게 맛있는 떡만두국이 밤새 조용히 잘 불었겠지요. 
왼쪽 겨드랑이에 껴서 잠든 고양이가 고르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애는 칠 년째 제 왼쪽에 붙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왼쪽이 좋은가 봐요, 그래서 좋아하는 자리를 존중해 주기로)

인생에는 아주 억울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개인적인 억울함과 적개심에 관한 감각이 특히 예민하게 발달한
저 같은 사람은 종종 괴로운 상황들을 겪습니다. 
일을 포함해서요. 말도 안 되는 분량, 말도 안 되는 페이,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기간을 제시하는 주제에 
제시하고 말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말이 되는 결과물을 요구하면서 뻔뻔한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최근 담합했나 봅니다. 
친구들 대부분이 사회 초년생이고, 대부분 프리랜서, 혹은 
을의 입장에 있는 회사의 말단 직원이다 보니 자주 함께 한탄하지요.
"갑들은 어디서 이런 걸 배웠을까?", "갑질하기 워크샵에서,"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엔 우리도 서서히, 자발적으로
유순한 을로 성장하는 훈련을 하고 있단 걸 
깨닫고 헛웃음을 웃곤 합니다.  


3. 그래도 아무튼 결론은 저는 주말마다 꽃을 사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위정자의 폭행이나 행정가의 만행, 
그보다 자주, 오직 본인의 실책과 모순이 유발한 고통을
겪는 동안에도 피곤한 주말에 꽃집까지 옷깃을 세우고 걸어가
집에 가는 동안 냉해를 입지 않도록 신문지로 잘 싸준 꽃을 
한 단 사서 손질해 꽃병에 꽂고 쳐다보는 일은  
과거에 얼마나 추악한 일들을 저지르며 살았건간에
그게 앞으로도 추악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교훈을 실습하는 기분을 줍니다. 
방세를 밀리면서 술을 사마시고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며
자기연민이나 의존적 습관에 빠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있는 조금 더 나은 면을 바라보고 개발하게 해줍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과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들을 구분하는 일도
언젠가는 좀더 낫게 할 수 있겠지요. 
꽃을 살 수 없을 때는 개업식 화환에서라도 뽑아오며 지낼래요. 

연휴 동안엔 일이 없어서 오늘은 세수도 않고 종일 쉬었어요.
무릎에 고양이를 얹어놓은 채로 꽃그늘 책상에 앉아서
시간이 나면 읽으려고 보름째 가방에 넣고 다니던 책 
(피터 싱어, 『실천윤리학』)을 뒤적이면서 유튜브의 스미스 채널을 틀어둡니다.

포스트 교양속물 논쟁-_-의 시대에 이런 말은 비웃음을 유발하겠지만
전 여전히 스미스를 좋아하거나 스미스를 듣는 사람이라는
말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것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로 스미스를 듣는 것 치고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의미로요-_-


4. 모두 괴로움 없는 연휴를 보내셔요. 혼자 보내는 저는
친척들의 속 모르는 잔소리와 긴 여행에서 자유로와 좋지만 
조금 외롭고 심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듀게에 길고 긴 바낭글을)
내일의 요리는 표고버섯 쌀국수!


 
(고양이의 초상권을 방어한 오늘의 사진.)


 '당신과 나누지 않겠어, 안돼 
 내가 느끼는 열망과 야망, 열정 
 그건 나만의 시간. 

 내 편지를 읽고 당신은 말했지
 페리에에 취한 걸까 아니면
 삶이 거칠고 비참한 거냐고

 당신과 나누지 않겠어, 
 내 열망, 그리고 내밀한 꿈은
 나만의 것이니까

 삶은 다가왔다 사라지지
 괜찮아, 알고 있으니
 나는 그 자유를 원해, 그 속임수를 원해
 나는 그 자유와 속임수를 원해
 삶은 다가왔다 사라지는 것...
 당신과 나누지 않아
 당신과 나누지 않아
 우린 어디선가 만나겠지, 
 언젠가 보겠지, 달링...'

(더 스미스, "I Won't Share You")

"... 벤담은 미래를 내다보는 한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 외의 동물세계가, 폭군이 아닌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프랑스인들은 피부가 검다는 것이 한 인간에게 멋대로 고통을 주고도 보상하지 않고 버려 두어도 될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이미 발견했다. 언젠가 다리의 수, 피부의 융모여부, 천골의 끝생김 등이 감각이 있는 존재에게 고통을 주고도 보상하지 않는 그러한 대우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 그 밖에 무엇이겠는가? 이성의 능력인가 아니면 혹 담화의 능력인가? 하지만 완전히 자란 말이나 개는 하루나 일 주일이나 일 개월이 된 유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더 잘 통하고 더 합리적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이성을 가질 수 있는가, 그들이 말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겪을 수 있는가이다.'
[...] 만약 내가 손바닥으로 말의 엉덩이를 세게 친다면 말은 달려갈 것이다. 그러나 말은 아마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말의 피부는 단순히 치는 것을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두껍다. 그러나 내가 똑같은 방식으로 아기를 친다면 아기는 울 것이며, 아마도 고통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의 피부는 훨씬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똑같은 힘으로 친다고 해도 아기를 치는 것이 말을 치는 것보다 더욱 나쁘다. 우리가 손바닥으로 아기를 쳐서 주는 것과 같은 고통을 말에게 주려면 말을 두들겨 패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큰 매로서 두들겨 패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같은 양의 고통' (the same amount of pain) 이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기에게 마땅한 이유 없이 그만한 고통을 가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종족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마땅한 이유 없이 말에게 같은 양의 고통을 가하는 것도 동등하게 잘못이라고 간주해야만 한다." 
(피터 싱어, 『실천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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