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쇼를 해라, ...쫌 제대로.

2012.01.25 18:37

LH 조회 수:2853

 

입 안이 까슬하고 밥맛이 없을 때, 물 말은 밥 드셔보셨습니까. 물 한 잔 부어넣고 휘휘 저어 먹으면 물 덕분에 술술 넘어가지요. 저도 어린 시절 그렇게 해서 먹곤 했습니다. 치즈 한 장 죽 찢어넣기도 하고, 혹은 스팸 한 조각 던져넣기도 하고. 그러다 나이든 어르신 들께 그렇게 밥 먹는 게 아니라고 잔소리 듣기도 했지요.

이걸 한자로 쓰면 수반(水飯)입니다. 물 수자에 밥 반자, 말 그대로 물 말은 밥이었지요. 옛 사람들은 물 말은 밥 참 자주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반은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밥에다 물을 넣으면, 아무래도 양이 불지요? 그래서 손님이 갑자기 오거나 급히 많은 양을 차려야 할 때 내 왔습니다.

그런데 임금인 성종은 자주 수반을 먹었습니다. 해서 신하들이 잔소리 좀 했습니다. 그냥 밥 좀 먹으라고. 사람의 위장이란 찬 걸 싫어하기 마련인데, 자꾸 수반만 먹다보면 속에 탈 난다고. 하지만 12세의 성종은 싫다고 버텼습니다.

 

"세종은 풍년이 들어도 물 말은 밥 먹었다는데?"

 

왜 그리 성종은 물 만 밥을 먹었을까요. 그건 반찬 투정이 아니라... 성종 1년 당시 나라에 지독한 가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수반은 가난한 사람의 밥이었고, 또 밥공기에 물을 부으면 공기 벽에 붙어있는 밥알 하나하나를 손 쉽게 떼어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굳이 수반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나라에 가뭄이 들거나 홍수, 전염병 등등 변란이 생기면 임금은 자기 밥상에서 반찬을 하나 둘 덜어내 먹곤 했습니다. 이걸 감선(減膳)이라고 했지요. 수라상 하면 보통 12첩 반상이 되겠거니 생각하기 마련인데, 사실 아침 일찍 받는 죽 상과, 국수 등을 먹는 야식까지 생각하면 하루에 5번 밥상을 받았습니다. 하여간 뽀지게 차려먹는 거죠. 하지만 감선을 하면 여기서 반찬을 몇 개 덜어내고, 고기나 물고기의 양도 줄였습니다.

 

영조는 여기에 더해 고기반찬을 없애 온 밥상을 푸르게 푸르게 골프장으로 만들어놨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입는 곤룡포를 무려! 빨아서! 입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야채 위주의 식단과 청결함을 유지하여 조선 국왕들 중에서 최고 장수 기록을 세운... 거 이전에 검소한 임금으로 이름을 남겼지요.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임금이 지금 물 말은 밥 먹고 반찬 하나 줄인다 한들, 굶주린 백성들이 그 반찬을 먹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고기 안 먹고 밥 한 숟갈 씩 덜 먹는다 해도 당장 병으로 앓아누운 백성 입에 그 밥이 들어가는 건 아녀요.

이건 그냥 쇼 하는 겁니다. "나는 이처럼 백성들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나 자신도 절약하고 있어효-" 라는 성군 이미지를 연출하면서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지요.

실제적으로는 별 소용이 없고 문제 해결에 도움도 안 되는 그런 쇼를, 임금들은 자그마치 수천 년전 부터 계속 해왔습니다.

게다가 이건 우리나라 만의, 그리고 최근만의 일은 아닙니다. 영국 왕실의 남자들은 계속 해군에 복무했지요. 한참 전 해리 왕자도 아프간에 다녀왔고.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는 2차대전 시절에 운전병으로 근무하며 직접 자동차를 수리하고 조립했어요. 어떻게 보면 그 사람 하나 있건 없건 별 소용 없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리 하겠지요.

그렇다면 이건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게 비록 가식이고, 뒤돌아 서서 몰래 대보름달 빵에 우유를 냠냠 먹을지라도 어쨌거나 겉으로는 국민, 백성과 함께하고 그들의 아픔을 나누며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의 상을 만들고 계속 재생한다는 거죠.

누가 소용없는 거 모른대요. 그래도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알아본 사람들 몇몇은 저 가식쟁이 쯧쯧 하고 욕을 하겠지만 그래도 멋지게 짜여진 쇼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고, 즐기고, 감동받으며, 그리고 박수를 치지요. 좀 감상적인 사람이라면 "아, 임금이 우리가 어려운 지경에 있는 걸 아는구나."하면서 고맙다고 눈물까지 흘릴 거여요.

 

시대적 상황과 임금의 연기력이 좀 받쳐주면 아주 역사의 명장면이 탄생할 수도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나라에 메뚜기들이 날뛰어 농사가 흉년이 들자, 직접 들에 나가 메뚜기 몇 마리를 잡아다 "차라리 날 먹어라." 라고 하며 쌩으로 섭취했습니다. 이는 메뚜기가 육식성이 아닌 초식성임을 무시한 처사이고, 결국 무자비하게도 산채로 위액에 소화되게끔 하는 형벌에 처한 거긴 하지만. (그리고 당 태종이 이미 했던 일이지만)
다 알아요. 메뚜기 몇 마리 먹어버린다고 사태가 해결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거죠.

그거에 넘어가냐! 하겠지만, 넘어가는 사람들 많아요.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게 그 훌륭한 증거입니다.
실제적인 실현이나 당장의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감성 마케팅인 거지요. 하지만 이 쑈를 할 때 꼭 필요한 게 있으니, 잘 해야 된다는 거죠. 잘 못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해요. 마치 트릭이 뽀록난 마술쇼가 욕을 처먹는 것 처럼, 연기 잘 해야 하고, 배경 및 음향 잘 받쳐줘야 하고, 상황극은 매끄럽게 돌아가야 하며 게스트들의 호응도 손발이 잘 맞아야죠.
그렇게 잘 된 쇼에는 박수쳐주며 호응해줄 수 있지만, 그리하여 스트레스를 줄이고 카타르시스도 맛보지만, 그렇지 못한 쇼라면... 저게 뭐야! 하고 투덜대게 되죠.

 

대통령의 재래시장 시찰은 바로 이런 실패한 쇼 였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어제 이야기를 너무 급하게 쓰다보니 좀 오류가 있는 듯 하야 보충해서 씁니다. 사실 몽클레어건 시민들 마음의 상처건 뭐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현 대통령은 "진정으로 가당치 않게도" 자신이 뼛속까지 서민이고 배고파 봤고 고생도 해봤고 세상 났다 군대 빼고 안 해본 일이 없다고 깔대기를 꽂고 다녔지요.

이제까지 재래시장 갈 때 마다 국밥, 호떡, 오뎅, 국수, 뻥튀기 기타등등을 쳐묵쳐묵 먹어온 이유가 뭐겠어요. 영부인이 불쌍한 출판사 쥐어짜가면서 서민 입맛의 대통령이라고 선전 책을 쓴 이유가 뭐겠어요? 뼛속까지 서민 대통령이라고 (아무도 안 믿어주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하고 내세우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손녀의 패딩은 그 수많은 노력을 한 방에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마리 앙트와네트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드세요." 라고 말해서 이미지 훅 간 것 처럼요. 원래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곤 했지만,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그 말로 마리 앙트와네트의 모든 걸 규정짓고 - 혁명으로 이어졌죠.
 
뭐, 그 어린 아이가 무슨 생각이 있어 옷을 입었겠어요.
그러니까 이건 어른들 잘못 맞죠.
애초에 본래 목적이던 시찰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쓸데없는 논란마저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감기는 안 낫고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졸립니다.
진심으로, 좀더 영악하고 연기력이 뛰어난 대통령을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http://www.facebook.com/historyminstrel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58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615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6211
83935 좋은 꿈들 꾸셨나요? 저보다 멋진 꿈 꾸신분은 없을거 같은데요...^ 2012.01.25 785
83934 연주 중에 벨소리가 울리면 [1] 나나당당 2012.01.25 929
83933 엄마 멘붕시키기.jpg [12] 라곱순 2012.01.25 17499
83932 절대바낭-뜬금 없이, 휴대전화 없던 시절 생각 [13] 방은 따숩고 2012.01.25 2015
83931 [기사펌]올림픽을 앞두고 박지성 부담주는 기사.. [7] 라인하르트백작 2012.01.25 1700
83930 [잡담] 바이오쇼크1 [2] 룽게 2012.01.25 1705
83929 듀9) 부동산사이트 가장 괜찮은 곳이 어디인가요? [6] 토토랑 2012.01.25 1585
83928 듀나in) 서울에 진료비가 합리적인 치과 아시는 분 추천 좀 부탁드릴게요 [12] 가끔만화 2012.01.25 4061
83927 러시아의 개념 극장 티켓 [19] Johndoe 2012.01.25 3893
83926 [바낭] 다이어트 모임글이 안올라와요 [6] 네멋74 2012.01.25 1020
83925 Ryan Gosling의 재발견! [5] 반달강아지 2012.01.25 2166
83924 이북 리더 어떤 게 좋을까요? [13] zn 2012.01.25 3779
83923 [도움요청] 강아지가 경련발작을 하였습니다. [9] 우주사탕 2012.01.25 4279
» [역사 야그] 쇼를 해라, ...쫌 제대로. [6] LH 2012.01.25 2853
83921 오늘 하이킥... [18] DJUNA 2012.01.25 2087
83920 이 개 품종이 뭔가요? [5] 나나당당 2012.01.25 2267
83919 강용석이 의원직을 걸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박원순 시장 아들 동영상에 100만원 현상금? [17] chobo 2012.01.25 2793
83918 회사에서 사고를 쳤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ㅜㅜ (글 깁니다) [24] 애플마티니 2012.01.25 10198
83917 요새 감기 정말 독하네요 [8] zaru 2012.01.25 1674
83916 오늘 해를품은달 [35] 보이즈런 2012.01.25 334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