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좋아하는 미드인 보스턴 리갈의 시즌 4 마지막회에 나오는 이야기. 주인공 변호사 앨런 쇼어에게 한 판사가 찾아옵니다. 본인이 콩코드에 사는데, 미합중국에서 독립하고 싶다는 겁니다. 이유는 현재(당시 기준으로 부시 행정부) 미국의 정책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9/11 테러를 기점으로 미국이 급격히 보수화되어 애국자법을 통과시키고 많은 이들을 억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젊은 변호사 앨런이 이 사건을 맡자, 그의 절친이자 로펌의 이사인 나이 많은 변호사 데니 크레인은 진지하게 앨런에게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아예 독립을 저지하려는 미합중국측의 변호사를 자처합니다.

 

데니가 앨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난 매일 밤, 내일 미국이 공격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가지고 잠에 들었어. 자네는 결코 이해하지 못해." 그렇습니다. 적의 공격으로 전쟁이 나고 나라가 망해버릴 수 있다는 공포를 가진 사람에게는, 9/11 이후 미국의 보수화는 정당한 이유가 있고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맞서 개인의 권리를 외치는 것이 오히려 철없어보이죠.

 

문득 우리나라 정치 현실을 생각해보니... 미국보다 훨씬 더하네요.

 

이 나라의 보수도 지금껏 "공포"를 우려먹고 살아왔습니다. "북괴가 언제 밀고 내려올지 모르는데 민주주의 따위를 논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이유로 독재를 했고, "다소의 부작용을 감수하고 빨리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우린 굶어죽는다"는 이유로 왜곡된 성장모델을 밀어부쳤고, 이제는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재벌에 대한 규제 강화, 복지 정책 확대에 반대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 삐끗하면 이 나라가 망해버리는 게 가능하다"는 공포를 뜯어먹는 것입니다. 공포감을 느낀 사람은 삐끗할까봐 진보적으로 한 발을 떼지 못하고, 현상태라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수를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 진보정당이 과연 올해는 저 공포를 극복할까요? 과연 사람들은 언제쯤 "이제 진보정당을 찍어줘도 나라가 망하진 않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될까요?

 

p.s. 어릴 땐 그런 공포를 가진 이들이 참 이해하기 어렵고 비겁해보였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게 이해가 되고, 이러다보면 제가 그런 공포를 갖게 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늙어가나봐요. 사람이 늙어가는 법은 있어도 젊어지는 법은 없으니, 진보정치는 참 더럽게 어려운 길이네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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