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비유들...

2012.03.05 21:19

차가운 달 조회 수:1300

 

 

 

조금 전까지 방바닥에 드러누워 김영하 소설집을 읽고 있었는데요,

'마코토'라는 단편 마지막에 꽤 재미있는 비유가 있더라구요.

 

 

마코토가 두 팔을 뻗어올려 허공에서 휘청대는 내 허리를 감아안았다. 도둑키스와 어설픈 포옹은 생각보다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나는 거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와 키스를 하고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득해지는 감각 속에서 내 영혼이 마치 잘 맞은 야구공처럼 펜스 너머 저 광대한 우주로, 하나의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암전.

 

 

이게 소설의 마지막 대목인데, 야구공 비유를 읽는 순간 뭔가 아주 시원한 느낌으로 와닿더군요.

마코토라는 이름 때문인지 신카이 마코토의 우주를 다룬 애니메이션 한 장면이 언뜻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아무튼 이 비유는 작가가 힘을 꽉 주고 썼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물론 제 생각이에요.

그리고, 오래전에 읽었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김사과 소설의 한 대목도 떠올랐어요.

거기에도 야구공이 들어간 무척 인상적인 비유가 있었거든요.

온전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아 책장에서 책을 가져왔죠.

 

 

그는 단지 너무 피곤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로 그에게서는 피곤이 떠난 적이 없었다. 한에게는 그의 인생이, 새벽부터 밤까지 야구게임기 앞에 서서 끊임없이 날아오는 공을 끊임없이 때리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정오의 산책'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비유인데, 그전까지 서술된 주인공 '한'의 인생사와 맞물려 아주 선명한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다고나 할까요.

지금 다시 보니까 야구게임기를 피칭머신이라고 썼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리고, 멀리 날아가는 야구공의 이미지 때문인지 이장욱의 '변희봉'도 떠오릅니다.

특별한 비유는 없지만 야구 시합 도중 밤하늘로 날아가 사라져 버린 야구공이 소설의 중요한 소재로 나오거든요.

 

 

이대호가 친 공이 까마득하게 날아갔다. 펜스를 향해 둥근 궤적이 그려졌다. 만기도 말을 멈추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야간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조명 너머로 검은 하늘이 보였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날아가던 공이 포물선의 정점에 오르는 순간, 화면 중앙으로 몰려든 불빛들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공이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 역시 공을 놓친 모양이었다. 아나운서가 말했다. 아, 아, 공이 어디로 갔나요? 조명 속으로 들어갔나요?

 

 

그런데 공은 밤하늘에서 그대로 사라졌단 말이죠.... 그 공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면 안될 것 같네요, 아무튼 읽어 보시면 알 수 있어요.

이장욱 소설집은 제가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에요.

작가가 특정한 테마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긴 했지만 아무튼 문체도 마음에 들고 다 재미있더군요.

 

사실, 얘기를 꺼낸 김에 인상적이었던 비유들에 대해서 좀 써보려고 했는데 막상 떠올리려 하니까 별로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이 없네요.

좋아하는 문장들이라든가 좋아하는 장면들은 많이 있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비유는...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는 제가 두고두고 떠올리는 비유가 하나 있어요.

'남아도는 여가의 드넓은 광장'이라는 단순한 표현이라 특별할 것은 없어 보이는데 아마도 그 비유가 나온 문단 전체를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의 커다란 비극 가운데 하나는 시간 부족이다. 과학에 대한 사심 없는 열정이나 지혜 때문이 아니라 시간 자체에 대한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독창성과 사회의 소득 가운데 큰 몫을, 일을 보다 신속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찾는 데 투자하고 있다. 마치 인류의 궁극적인 목적이 완전한 인간성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번갯불에 가까워지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그러나 찰스에게, 또한 시대 사회적으로 그의 동료였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존재를 지배하는 시간의 박자는 분명 아다지오였다. 문제는 한정된 시간 속에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남아도는 여가의 드넓은 광장을 채우기 위해 일을 일부러 질질 끄는 것이었다.

 

 

찰스는 19세기 영국의 상류층 청년입니다.

지질학자를 자처하는 그는 느긋하게 돌이나 주우러 다니며 아다지오로 흐르는 시간을 마음껏 맛볼 수 있었겠죠.

아무튼 저는 가끔 그 비유를 떠올려요.

남아도는 여가의 드넓은 광장에서 마음껏 뒹굴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이죠.

 

혹시 지금 느긋하게 책을 뒤적거려서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비유나 문장이나 아무 거나 댓글로 한번 적어 주실 분?

남아도는 여가의 골방에 처박혀 있어서 힘들다구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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