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담] 그냥 해적 이야기

2012.03.11 08:06

LH 조회 수:2486


해군더러 해적이라고 한 발언이 문제가 되었더군요.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적절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해군을 해적이라고 한 말이 시끄럽기에 고구마 줄기 쭉 뽑아서 떠오른 기억들을 줄줄이 적어볼까 해요.
해적하면 카리브해와 조니 뎁이나 기타등등이 떠올리게 되지만, 아니면 게임의 대항해시대를 떠올리기도 하겠지만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 부터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은 배를 발명해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과 이걸 활용해서 남 삥뜯는 것을 거의 동시에 시작한 게 아닐까 해요.

 

일리아스에 나오는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나 오딧세우스도 사실은 좋은 길목에 진 치고 있다가 지나가는 배 털어서 한 몫 잡던 이들이기도 했지요. 사실상 옛날의 어촌이란 조금 편견 섞어서 말하자면 바다로 가서 고기잡고 심심하면 농사짓고 이도 저도 안 되면 해적질을 하기도 했거든요.
해적이라하면 보통 보물! 을 떠올리겠지만 그게 바로 지나가던 상선의 화물 털어댄 것이고, 또 진짜 수입원은 승객들을 잡아다가 몸값을 받아내거나 노예로 팔아치우는 것이었습니다.

좀 지나면 이런 해적 세력들은 그 자체로서 군사집단화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로도스 섬 기사단이 있습니다. 실제 이름은 성 요한 기사단이었지요. 기사라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예루살렘 앞의 좋은 길목을 떡 하니 잡고 앉아서 성지순례가는 이슬람 교도들의 배를 털고 노예로 팔아대는, 아주 훌륭한 해적이었지요. 이 짓, 나중에 로도스에서 쫓겨나 몰타 섬에 가서도 했어요. 온라인 대항해시대 하다보면 로도스 앞바다에 해적 나오고 몰타 섬에도 나오죠? 얘네들이랍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해적들의 행패가 심해지자, 각 나라들은 해상병력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위해서는 물 위의 활동 및 배멀미를 잘 버텨낼만큼 잘 훈련된 병사들이 필요했고, 배를 비롯한 각종 특수 장비들도 건조해야 했습니다. 결국 아마추어인 나라에서 직접 하느니 애초에 여기에 특화된 집단 - 집안을 고용하는 게 효과적이었던 거지요. 대표적인 게 도리아 집안 출신인 제노바의 안드레아 도리아가 있습니다. 웬지 음식점에서 곧잘 나오는 도리아 요리부터가 떠오르지만, 그 느끼한 맛과 달리 아무튼 그네 집안으로 이뤄진 해군을 이끌었고, 그를 누가 고용하느냐에 따라 당대 최강의 해군국 랭킹이 바뀔 정도였습니다. 처음엔 로마 그 다음엔 나폴리 -> 프랑스 -> 신성로마제국으로. 이들 도리아 집안이 싸운 대표적인 해전이 프레베자 해전과 레판토 해전입죠.

 

이건 이슬람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유명한 해적을 고르자면 역시 붉은 수염 하이레딘이겠지요. 사실 진짜 붉은 수염이었던 건 그 사람의 형이었고, 형의 뒤를 이은 뒤 수염을 염색해서 다녔다고도 합니다만. 암튼 지금의 알제리를 근거지로 열심히 해적질을 해댔습니다. 그러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해군제독까지 되어 아주 잘 먹고 잘 삽니다. 몰타의 매를 중간에서 쓱싹 하기도 하고. (응?)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의 아버지는 투르크 출신이되 어머니는 크리스트 교도였어서, 한참 지중해가 크리스트 교 VS 무슬림 구도로 싸우게 되자 카를 5세는 어떻게 얘를 자기 편으로 끌어올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찝쩍댔다는 거죠. 좀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시 해적들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어요.

 

동양 쪽에서도 해적이 많았으니, 중국의 정성공이 있습니다. 정성공은 지금 대만에서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니, 함부로 해적이라고 했다면 혼날 수도 있어요. 일본에도 무라카미 수군이 있겠네요. 우리나라는 영 해적과 인연이 없을 듯도 하지만, 장보고의 청해진도 해군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세력으로까지 올라섰던 이들이고 좀 찝찝하지만 신라구도 있긴 하지요. 그리고 어쩌다보니 조상님 한 분 '잘못' 둔 덕에 개인의 소질 취미 특기와 아무 상관없이 몽땅 굴비두름처럼 엮여 해군에 끌려가야 했던 덕수이씨도 있는 걸요. 물론 이들더러 해적이라고 하면 큰일납니다.

 

어쨌건, 그런 의미에서 해군이 정식적으로 출범한 것은 지극히 최근일 수도 있어요. 어차피 우리의 해군은 다른 나라의 해적이었거든요.

하지만 자국의 해군더러 해적이라고 하는 건 참으로 병크라고 할 만한 발언이지요. 촌철살인을 하려면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입니다.

 

언제고 시간이 된다면 해적들 이야기로 쫙 도배를 한 책을 쓰고 싶어요. 그런데 과연 누가 내준다고 할 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저 만을 위해 쓰고 재미있게 놀아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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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며칠 고민해봤네요.
사실 꽤 오래전부터 고민해왔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과연 내가 쓰고,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한 것일까. 그저 그럴싸하게 적당한 이야기를 꿰어다가 얼기설기 맞출 뿐인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사는 가장 많이 프로파간다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짓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요.

 

처음 여기에 글을 올린 것은 외롭고 심심해서였어요. 제 글을 보고 사람들이 재미있어 해줄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고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역사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엄밀해서 그래요.
실제로 여기 올리는 글에는 오타도 많고 오류도 있고, 그저 자는 시간 줄여서 머리 속에서 떠돌던 문장 하나하나를 두드려맞춰서 두 세 시간만에 마구리해서 던져놓는 정도이거든요. 잘 못도 많고, 아마 정말 역사 잘 아는 분들이 보시면 정말 조악할 겁니다.

 

그러니 제 글에 그렇게 굉장한 가치는 없다고 봐요. 이걸 토대로 타인을 업수이 여길 정도로는 말이죠.

그런데 제가 모르는 사이에 그리 되었나 봅니다.

 

어떤 분의 지적을 듣고 나서 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했네요.
그저 생각없이 한 푸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글을 많이 쓰다보니 조금 호응을 얻고, 그런 와중에 어느새 제 일파(?)를 만들고, 또 그걸 활용해서 남에게 텃세(?)를 부리려고 드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라고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짓을 저 스스로가 남에게 하고 있었던 거여요.
그럴 생각이 없었더라도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글을 쓴 게 경솔하기도 했고요.

 

...그것 외에도 고민 거리는 있었습니다. 그간 게시판에 역사 주제로 글이 올라올 때 가끔 제가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언급되건만. 정작 전 전혀 말한 적이 없었던 것도 몇 번 있었지요. 그런 적 없는데요, 라고 말을 할까 몇 번이고 망설이기도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제가 어떤 권위가 된다는 건,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앞에서 말했듯이 제가 공부를 완벽하게 한 사람도 아니고 남보다 조금 더 아는 정도이니까요.

 

생각이 많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두어 달 가량 일신상의 이유로 바쁘기도 했으니, 한동안 머리 식히고 오겠습니다.

이 글을 보는 많은 분들, 많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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