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하루키붐이 막 시작될 때, 그러니까 90년대 후반에 좀 미운 표지 디자인의 상실의 시대를 다들 끼고 다니기 몇 년 전 90년대 중반에 그의 글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리고 팬이 되어, 중고생시절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제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책을 한권씩 샀고요.


하루키 얘기가 나와서 조금 보태면, 저는 빠-_-까지는 아니라도 그의 글을 꽤 좋아합니다. 장편을 안 읽진 않았지만 특히 에세이나 단편을 좋아해요. 일본어를 처음 공부하고, 일본에서 살던 교환학생시절 대학 기숙사가 키치죠지 근방이었습니다. 키치죠지는 하루키가 재즈찻집 피터 캣츠를 열었던 고쿠분지랑 그리 멀지 않지요. 소설에 나오던 일부 장소들을 가보고 혼자 감격했어요. 그리고 또, 일본어를 읽게 되면서 그의 에세이집을 원문으로 접했는데 문장이 참, 뭐랄까 일본어의 맛을 잘 살린 깔끔한 문장이에요. 동경대 수업 중에선 "하루키 소설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주제로 빵가게 습격과 빵가게 재습격을 다룬 강의도 있었고요.


봄이 오면, 저는 그의 단편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을 떠올립니다. 주인공과 와이프, 그리고 고양이 세 식구가 돈이 없어서 국철과 사철이 만나는 치즈케이크 조각 같은 모양의 땅에 세워진 집에 사는 얘기에요. 봄이 와서 춘투 파업이 시작되면 세 식구가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단 얘기는 뭔가 찡해지는 좋은 단편입니다.


오빠가 없는 저는 "패밀리 어페어"에 나오는 오빠를 원했습니다. 여동생 남자친구한테 은근히 질투하는 주인공이 참 귀엽지요.


뉴욕에는 일본식 빵집이 많아요. 메론빵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메론빵을 볼 때마다 "빵가게 습격"을 생각합니다.


많은 서양 문물'ㅅ';;;도 그의 책을 통해 접했습니다. 비틀즈의 러버 소울 앨범을 처음 들은 게 그의 소설 제목 때문이고, 술을 전혀 즐기지 않지만 여름밤엔 맥주캔을 따기 시작한 게 그의 글 때문이고요. 스파게티를 삶으면서 그의 단편 "스파게티를 삶다"를 떠올립니다. 혼자 살면서 처음 스파게티를 삶았을 때 아, 나도 드디어 어른이구나 하고 감격했던 기억이 나요.


그의 수필집에는 두고두고 반추하고 싶은 구절이 많이 나와요. 지난 하루키 논쟁 글 댓글로 달았던 코트 주머니에 아기 고양이를 넣은 것 같은 행복은 정말 그 행복이 뭔지 만져지는 느낌. 그리고 또 오늘 생각난 건 이런 겁니다.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어린 시절 라디오를 듣는데 청취자가 전화해서 "비틀즈나 롤링스톤즈 따위의 시끄러운 음악 참 싫다. 그런 음악은 곧 유행이 지나가버릴 거다." 하고 말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했는데, 몇십 년이 지나도 그 둘의 음악은 사랑받고 있지요. 그러니까 앞으로의 일을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아아 결론이 뭐 이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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