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예고를 보면서 '정릉'이란 단어를 봤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90년대, 딱 그 시점에 정릉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정릉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하는 궁금함만으로도 건축학개론이 보고 싶었습니다. 

 

 이미 그 시절 정릉은 변화 아니 없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재개발은 세포와도 같던 무수히 많은 골목길과 그 골목길을 만들어내던 작고 낡은 집들을 죄다 아파트로 만들었으니까요. 

 그래도 이용주 감독이 발품을 많이 팔았는지 그 시절 정릉과 비슷한 곳을 찾아 거의 비슷하게 재현하더군요. 

 


 1. 정릉 숭덕초교(그땐 국민학교) 앞에서 8번 버스를 타면 국민대 지나 북악터널을 넘어서 다시 상명대학교를 지나 

    서울시내에 거의 없는 구불구불 길과 개천 길을 지나 홍제동을 지나 신촌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8번은 8-1번하고 두 종류가 있어서 잘못타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일 수라 긴장하고 타야 했습니다. 


 2. 승민과 서연이 가장 멀리 있는 곳을 찾아 가기 위해 탄 버스가 아마도 당시의 710번 버스 일겁니다. 

   

http://www.daejintrs.co.kr/daejin/frame.html


 정릉 청수장에서 출발하여 개포동까지 가는 정말 먼 길가는 버스였습니다. 영화의 딱 그 시점에 압구정동으로 이사갔던 친구를 만나러 이 버스를 타고 

 가던 기억이, 잊혀졌던 기억이, 났습니다. 


 3. 정릉으로 들어가기 전 아리랑 시장이 있습니다. 지금도 아마 어느정도 남아 있을텐데 영화에서 승민의 엄마가 하던 순대국밥집같은 집들이 꽤 있었습니다. 


 4.  무엇보다 가장 공감이 가는 장면이었던 납뜩이와의 정릉독서실 시퀀스들은 이용주감독이 한때 정릉에 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재현도가 높았습니다. 

   그런 고지대에 당시 독서실이 꽤 있었는데 지금의 서경대 (당시는 국제대였죠)와 대일외고와 당시 대일여상이 있던 부근입니다. 딱 그 정도의 고지대에 

   독서실과 주택들과 계단, 골목길이 혼재 되어 있는 그곳에 친구들과 여자얘기, 학교얘기등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씨네21과 이용주 감독의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건축학개론이 10년에 걸친 프로젝트였다고 합니다.

영화의 주 관객층인 20대에 어필할 수 없는 시나리오라 많이 무산되었다고 하더군요. 

친구였던 이해영 감독은 도시락싸고 말렷다고 하고 봉준호 감독은 (이용주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라고 하네요) 건축학개론? 그거 하려고? 

하는 우려섞인 시선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생사 아무도 모르는 거네요. 불신지옥의 실패를 만회하고 일각에서는 레전드급이라는 영화를 만들어냈으니 말이죠. 


보통 홍상수 영화를 두고 리얼리즘에 가까워서 그의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싫다고 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러나 저에겐 건축학개론이야말로 리얼리즘이 아니라 그냥 '리얼'이었습니다. 

이용주 감독도 "반성문 같은 영화다"라고 말했는데 

단순한 반성을 떠나 이승민이란 캐릭터는 

과거의 나 뿐만 아니라 현재의 나 까지 건드리는 아주 비겁하고 쪽팔리는 남자 캐릭터 였습니다. 

불편해서 짜증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후회되서 내게 직접적으로 분노를 일으키는 그런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추억은 시간이 지나면 판타지처럼 미화될 수 있지만

현재의 나는 그때의 나처럼 한 치도 성장하지 못 한, 아니 그때보다 더 못되고 더 나쁜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였습니다. 

건축학개론은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나 어렵다는 걸 알게 해 준 영화였고 

오늘, 출근 길 거울에 비춰 진 얼굴이 이렇게 늙어 버렸다는 걸 알게 해 준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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