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어떤 영화보다도 즐겁게 본 <은교> 입니다. 
감독의 연출을 믿고 화면들을 하나하나 음미해가며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첫 장면 부터 좋습니다. 
이적요가 사는 전원주택을 쭉 보여주는데 이 평화로운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엄습해와요. 
왜 너무 조용할때 발생하는 공포랄까요. 현관에서부터 외부를 보여주다가 창을 통해 내부을 힐끗 비추는데, 
이적요의 아주 큰 인물사진이 있습니다. 마치 김현이나 조영래의 그것과 아주 비슷한 이적요(박해일)의 모습입니다. 

등기 봉투를 뜯어 시집을 꺼내는데 그게 또 최근에 읽은 박형준의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입니다. 
책이 가득한 서재가 보이는데 이런 장면들이 좋아서, 저는 일단 먹고 들어갑니다ㅎㅎ

난데없이 영화 <박쥐>에 나올법한 서글픈 리코더 연주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적요는 거울 앞에서서 옷을 벗으며 노쇠한 자신의 몸을 살핍니다. 
이때 쪼그라든 성기를 보여주는데 이 또한 박쥐의 한 장면을 상기시켜주는터라 재미있더라구요. 
인상을 찌푸리는 이적요. 자신의 몸을 보고 있죠. 그런데 바로 다음 컷에서 측면의 모습을 풀샷으로 잡으며 
이적요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을 동일시 하게 만듭니다. 

터벅터벅 새벽 산길을 화면 왼쪽에서부터 오르는데 
오른쪽 위에는 보름달이 크고 밝게 떠 있어요. 잠시 오르다 허리를 피며 달을 올려다봅니다. 
동시에 서지우가 자신의 소설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잠시 끼어들고 화면이 바뀌어요.  
저자 사인회 현장에서 낭독을 하고 있는데, 읽는 내용이 의미심장 합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달을 본 적이 없어........ 사람에 따라 같은 사물이라도 다르게 보이는 법이지". 
그러니까 이것이 이적요가 쓴 글이라는 사실을 은밀히 보여주는 장면이랄까요.

이 3분 남짓되는 도입부에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두가지 큰 축을 모두 보여줍니다. 
첫째는 늙는 것에 대해. 둘째는 같은 사물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에 대해.

이적요가 출타 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흔들의자에서 은교가 오수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적요는 이 낯선 존재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봐요. 그의 시선으로 카메라는 은교의 몸을 훝습니다. 
재미난건 땀을 뻘뻘 흘리며 자고 있는 은교인데요. 이건 어린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예요. 
'이성복' 시인의 어느 시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자고 있는 아이를 보며 너의 생도 힘겹긴 마찬가지구나 했던게 기억이 나요. 
서지우가 들어오고 여기서부터 둘의 차이가 시작됩니다. 
그는 이 낯선 존재에 이질감을 느끼고 바로 따져 묻기 시작하는데, 이적요는 이와 상반된 다른 감정으로 바라봅니다. 
흔들의자를 짚는 손, 담벼락의 계단을 오르다 생겼을법한 다리의 상처.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카메라)는 바라봅니다. 
은교가 가고난 뒤 이적요는 그 자리에 앉아 의자를 만지며 그의 흔적을 어루만집니다. 
이렇게 이적요와 은교와 서지우는 만나게 됩니다.

이적요의 생일인가 봅니다. 서지우는 앞치마를 메고 미역국을 끓이며 음식을 준비하는데, 
전화를 받으며 자신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국이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는 모습을 가만히 보여줍니다. 
욕망은 들끓어 차고 넘치는데 다 담아내지 못하는 그릇을 가진 사람, 이런 의미일까요.

국이 짜서 이적요는 몇 술 뜨지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해가 지고 두 사람은 치맥을 먹습니다. 근데 아주 재밌게도 둘은 러브샷을 합니다ㅎㅎ. 
"자 이제부터는 자네만의 글을 써." 이적요는 말합니다. 그런데 서지우는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며 
자신의 책이 지금 얼마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지를 떠들어대죠. 
이 장면을 위해서 국이 끓어 넘치는 앞의 장면이 필요했나봅니다.

세사람은 산을 오릅니다. 
서지우의 손짓에 은교는 '안나수이 공주거울'을 절벽아래로 떨어뜨려요. 
똑같은 걸로 하나 사주겠다는 말에 엄마가 처음 사준 선물이라 이승과 저승만큼 다르다 합니다. 
이적요가 거울을 줍기위해 내려가면, 노인의 발걸음 만큼이나 느린 템포의 음악이 나오는데요, 
정지우 감독 인터뷰를 보니까 이때 삽입된 음악의 제목은 '용사의 노래'랍니다.ㅎㅎ 
이적요가 거울을 줍고 다시 올라오는데 서지우가 이것저것 주문을 합니다. 
거울을 주머니에 넣으세요, 여길 잡으세요... 그러나 이적요는 모두 다르게 하죠. 
나는 너와 다르다 인지 노익장의 과시 인지ㅎㅎㅎ

이 영화에서 가장 흥겨운 장면이 있었는데, 이적요가 소설을 쓰는 장면 입니다. 
파버카스텔 ufo뚜껑을 끼운 짧은 연필로 소설을 써나가는데 책상 옆 눕혀 놓았던 자신의 젋은 시절 액자을 일으켜 세우고, 
흥에겨워 책상을 손으로 두드리며 일필휘지로 써나가는게 그것이예요.
이에 반해 서지우는 글을 써내지 못합니다. 컴퓨터에 쓰기를 멈추고 원고지에 적어보지만 이내 지우고 찢기를 반복합니다. 
이적요가 흥에겨워 은교를 쓸때 
서지우는 청탁받은 원고를 지우고 찢으며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두 사람의 대비된 모습은 계속 나옵니다.

서지우가 은교의 거울을 다 똑같은 거울이라 할때, 이적요는 엄마가 사준거니까 소중하다 말하고. 
이적요가 흥에겨워 은교를 쓸때, 서지우는 청탁받은 원고를 지우고 찢으며 나아가지 못해요. 
서지우가 심장을 천박하기 짝이 없는 대중소설이라 할때, 이적요는 시적이고 인간에 대한 성찰이 뛰어나다 하고,
이적요에게 다가온 사랑을, 그는 더러운 스캔들이라 말합니다. 
이런 상반된 반응이 다름아닌, 
어떤 사물에서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는 때로 이승과 저승만큼 멀다, 
별이라고 다 똑같은 별이 아니다 의 재현이 아닌가 싶어요.


덧) 이적요는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평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이합니다. 은교가 읽은 '심장'에 대해, 서지우가 상을 받는 '은교'에 대해. 
비록 영화 내에서 일이지만, 
교과서에도 실리는 국민 시인이 장르소설로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일상을 담은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아요.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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