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쓰다 만 것 같아 계속 이어서 씁니다. 대략 1930년대 중앙동 개발까지 썼던가... 가물가물.



1930년대, 오랫동안 군사용지와 철도부지로 묶여 있던 중앙마산 해안 방면의 토지는 

지속적인 일본인 지주들의 탄원에 힘입어 용도변경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꽤 많은 밀담이 오고갔으리라 짐작되지만 자료가 남아있는 게 없어 확인은 불가.


그런데 이 해안가 땅... 이라는 표현이, 지금 입장에서 복기해 보면 상당히 상식 밖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탈 호텔 기준으로 동쪽은 죄다 그 해안가 군사용지였다는 얘깁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장군로 큰길 서편에 있는 마산의료원이니 세무서니 하는 게 몽땅. ㅎㄷㄷ

그리고 바닷물은.... 옛날 마산MBC 자리까지 찰랑거렸고 말이죠. (......)


원래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진주가도'는 지금 2번국도보다 훨씬 서편 산자락 밑에 붙어있었습니다.

이 흔적이 심지어 현재까지도 아주 온전하게, 원형 그대로의 모양으로 남아있습니다.

옛 마산극장(지금은 경남은행 신마산지점이랑 한우리..라는 식당이 있죠)부터 시작해서

월영초등학교 뒷길을 지나는 골목길은 2차선 도로 폭 정도 되는 소방도로입니다.

이 골목길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장군동 다리, 도립의료원, 크리스탈 호텔, 경남데파트를 지나

자산동 입구에서 큰 도로와 합류합니다. 이게 옛 진주가도의 흔적이죠.

구한말, 아직 일본에게 주권 강탈하기 전인 1900년대 초 순종황제의 어가 행렬이 이 길을 따라

외국공동조계지(현 신마산 댓거리 인근)까지 갔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향토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길을 보존해야 한다 vs 나라잃은 황제 흔적 따위 왜 보존하냐

라는 떡밥으로 아옹다옹했는데, 최근에는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가치가 높아지고 있으니

역사의 현장으로 기념할 만도 할 것 같습니다.


1930년대말 중앙가도(현재의 3.15대로.. 20세기에는 장군로라 불렀음)가 뚫리면서 

구 진주가도 부분은 2번국도 지정에서 해제, 이면도로로 대체됩니다.

하지만 구마산 부분은 그 때까지만 해도 매우 좁은 골목길로 이어져 있었는데,

이 곳에도 신작로가 뚫립니다. 신작로라고 해도 현재의 2차선 도로입니다.

바로 창동네거리, 불종거리, 남성동파출소 앞 도로, 부림시장 사이의 도로들입니다.

(단 부림지하상가-구 연흥극장 사이 4차선도로길은 1977년 이후에 뚫린 거고 당시에는 철길-_-;이었습니다.)


원래 남성동파출소 자리가 숙종시대부터 있었던 조창(현재의 세무서?)인 "마산창" 자리였다고 합니다.

사진 남아있는 걸 보면 지금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하게 큰 단층누각인데 해체 후 그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 당시 누각들은 해체되면 그 자재나 기둥을 다른 건물에 활용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마산창 한복판에 십자로 길을 뚫어버린 게 현재의 남성동파출소 네거리인 겁니다.

근처에 조창이 있었으니 항구도 근처일텐데... 일단 조창의 곡식을 운송하던 곳은 육지에서 '工' 자 모양으로

툭 튀어나온 자연포구였고 각각 동굴강, 서굴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굴강 포구 자리가 

무려 현재의 불종거리 입구 삼거리입니다. 어시장에서 불종거리 올라올 떄 좌회전 신호받는 거기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 밑으로는 원래 몽땅 바다였다는 거죠. 거기가 포구 한복판 지점.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이 '동굴강' 포구까지 남겨놓고 서굴강은 매립해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대략 현재의 어시장, 그리고 대우백화점 옆 청과시장 자리까지가 매립한 부분입니다.


관 주도로 이루어진 공유수면 매립과 달리 이 곳의 매립은 한반도에서 거의 최초로 민간자본이 매립한 땅입니다.

민간자본이라고는 해도 일본인이지만요. 

재미있는 것은 일제시대의 그 심한 수탈에도 불구하고 마산지역의 경우 일본인 거리인 신마산의 상권이 

원래 조선사람 살던 구마산 상권을 완전히 집어삼키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마산은 구마산에 비해 

일제시대 초기에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고, 구마산 상권을 장악한 일본인들이 신마산을 거꾸로 먹습니다.(...)

당시 일본 자본 상당수는 갓 개항한 진해 군항으로 빠져나가고(심지어 이 때의 유곽 - 창녀촌 - 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가정집들이지만.) 경제주권을 침탈했던 일본인들이 부동산을 도로 팔아버려 

결과적으로 구마산에는 조선인 토지소유주가 은근히 있는 편이었습니다.


구마산의 조선인 상권은 경성 종로통 상권과 함께 일제시대 몇 안 되던 민족자본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은 암암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도 하고, 창신학교 등에 기부금을 헌사하기도 하는 등 상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이들 중 하나인 고 옥기환 옹은 해방되고 나서, 미군정이 임명한 관선 초대 마산시장까지 오릅니다. 

마산노동야학을 개설하는 등 꽤 선각자였던 사람인데, 옛날 마산시청 홈페이지에 걸려 있던 역대 마산시장의 영정사진 보면

그 시절까지도 망건 쓰고 두루마기 입고 수염 허옇게 기른 조선시대 사람 그 자쳅니다(....)


군항의 기능은 진해에, 일본 가는 길목으로서의 역할은 부산에 내어 주고 개항장에서 조용한 항구도시로 돌아간 마산은 

1920년대말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을 세우며 쌀 수출 항로로 경기 대박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부터 쓰던 동굴강 포구는 너무 비좁아 큰 선박이 들어올 수 없고, 중앙마산은 군사용지였으며,

신마산에 있던 선창(현재의 창포경남-창포한백아파트 자리)은 상업중심지인 구마산으로부터 너무 멀었죠.

이 와중에 어느 일본인 갑부(그는 경남지역의 땅을 무려 3%나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가 자금을 끌어와서

공유수면을 매립하고 분양사업을 해서 아주 돈을 갈퀴로 긁어쥐었던 거죠. (이름은 까먹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마산-중앙마산-구마산은 1930년대 말에 이르러 하나의 시가지로 딱 붙게 되고(연담화라고 합니다),

그 과정은 부산의 팽창과 달리 대규모의 행정력과 민간자본력이 결합된, 어찌보면 이 땅 최초의 

근대적 신도시개발에 가까웠습니다. (비슷한 예로는 신당동이랑 왕십리가 있긴 한데.. 여긴 가로망구획은 없었죠.)

그리고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광복을 맞은 마산은 1946년 부에서 시로 행정구역이 바뀝니다.

초대 시장은 위에서 잠깐 말한 옥기환 옹.


그 후 몇 년 안 있어 터진 6.25 때에는 낙동강 최전선이자 중요한 물자보급기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산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무학산 정상에는 아직도 이 당시에 파 놓은 교통호(참호)가 

손질까지 잘 된 채로 남아있습니다. (지금 한국인 체형으로는 좀 좁습니다...)

그 당시 인민군이 칠원, 중리, 진동까지 기어내려온 상태였는데.. 진동 읍내에서 진주 쪽으로 가다가

진북면 어귀 야트막한 고개에 보면 그 당시 국군이 승리한 전적비가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1990년대말 새로 크게 지은 국군통합병원이 들어서 있고...

원래 국군마산병원(구 국군마산통합병원)은 현재의 월영마을 아파트 자리에 있었죠.

이 곳은 원래 러시아 조차지였는데 일본이 빼앗에서 포병부대를 굴리던 자리입니다.

즉 지금 월영마을 아파트 한복판 공원의 연못이랑 돌다리는 그 역사가 110년쯤 된 겁니다.(...)

일본군이 물러간 후에는 국군 연대가 주둔했고 이들이 여순사건 떄 반란 일으킨 

국군17연대를 진압하러 급파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6.25 이후로는 주욱 마산통합병원으로 쓰였죠.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마산역에 앰뷸런스차가 뜨면 이 동네 병력들 묘한 긴장감에 휩싸입니다.

무궁화호 객차 중에 창문이 좀 이상하게 생긴 놈이 있는데 그게 국군 병원열차입니다.

그리고 병원열차에 실어서 후송오는 인간들은.... 대부분 상당히 상태 심각한 중상자들이죠.

전방부대 병원에 비해 상당히 장기간 요양이 필요한 인원을 이 쪽으로 보내는 거라 생각됩니다.



광복 이후 마산의 도시공간사는 크게 변화하게 되는데, 글이 길어지니 산업화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3.15~4.19 얘기부터 언급하는 게 시간순서에 맞을 듯합니다. (이것도 파고들면 무진장 길어지니...쿨럭)


사실 제가 마산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이 3.15이기도 합니다.

마산 동네 고등학생들은 3.15 의거일이 되면 학교 수업 공식적을 째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념행사에 가게 됩니다. 고1때 처음 참가했던 그 때만 해도 아.. 그냥 뭐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는갑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 후 도서관에서 발견한 낡은 책 하나가 저한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죠.

3.15 때 총 맞고 쓰러진 희생자 중에 마산고 1-C반 반장이던 김용실이란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제가 그 때 1학년 3반이었는지라(...) 한 삼십몇년 전에 반장 해먹던 사람은

용기있게 앞에 나가서 목숨까지 잃었는데 같은 공간에서 같은 직책에 있는 나란 놈은 그 상황에서

앞에 나갈 수 있었겠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나중에 이 얘길 들은 전남대 다니는 동생 한 놈은

"하이고 우리 고등학교 선배들은 금남로에서 탱크랑 맞장까다 총맞고 뒤져불제" 라고 하더군요...)


3.15라고 하는 1960년 3월 15일 이전에도 마산지역 민심은 꽤나 흉흉했던 모양입니다.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았으니 '투표 연습'을 해야겠다며 소위 3인조, 5인조 투표란 걸 하는데

이게 사실상 선거조작 수단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투표용지도 못 받은 사람도 부지기수였고

선거 당일에는 아예 이승만 표가 미리 기표되어 있는 투표함까지 튀어나올 지경이었습니다.(...)

1960년 선거를 앞두고 마신 시민이 워낙에 흉흉해서 당시 전국지였던 동아일보에서는 

아예 본사에서 기자를 급파하여 "3.15 카르테" 란 코너를 정기연재하고 있었는데

이 때 특파원이 이만섭 기자입니다. ㅡ 여러분이 아시는 그 이만섭 맞습니다. ㅡ,

경향신문은 이미 폐간되어 있던 상태였고 신문 중에선 사실상 동아일보 하나만 살아있던 상황.

(방송쪽에서는 CBS가 있었습니다.) 


선거 당일, 투표용지 바꿔치기까지 사태가 악화되자 민주당 경남도당에서는 선거포기를 선언합니다.

중심가였던 구마산 창동거리에 민주당원들이 나타나서 가두행진을 시작하자 군중은 금세 불어났습니다.

고 김용실군도 이 때 시위에 참가하러 마산선 철뚝(현재의 부림시장 대로)을 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찰서장이 (요새 인터넷 은어로) 병크를 터뜨리죠. 불종거리 마산교도소 앞(현 삼성생명 건물 자리)에서

모여 있는 시위대에게 해산하라는 방송을 하는 와중에, 지프차 위로 고등학생 하나가 기어올라갑니다.

경찰서장의 핸드마이크를 나꿔채고 기세좋게 한 마디 하려는데 사람들은 "자유.."외의 다른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서장이 갖고 있던 곤봉으로 그 학생을 복날 개패듯이-_- 두들겨패버렸던 겁니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여기서 잠깐 주의를 환기시켜야 할 게, 예나 지금이나 마산사람들은 전투종족-_-입니다. 눈 뒤집어지면 큰일납니다.)

그래서 길 가던 군중들까지 그 꼬라지를 보고 눈에 천불이 나서 시위대로 합류해 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격앙된 군중들을 향해 경찰은.... 반공청년단을 불러다가 애고 어른이고 학생이고 노인이고 몽땅 두들겨팼죠.

(이 때 부상으로 어깨뼈가 박살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불종거리의 시위는 이렇게 강제진압이 되는 양상이었는데

사람들은 몽둥이에 쫓겨가면서도 마산시청 앞에서 모이자라고 약속을 주고받습니다.


그날 저녁 신미신 마산시청 앞에 모인 군중들은 항의집회를 개시합니다. 낮의 폭력사건도 있고 해서

시민들이 상당히 격앙된 상태라 시위가 꽤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지금도 있는) 신포동 매음굴의

매춘부들이 치마자락에다 자산철교의 자갈을 주워다가 날라줄 정도였다고 하니... 자유당사는 당연히 대낮 즈음부터

투석을 맞아 유리창이 몽땅 깨졌고 경찰은 소방차에다 염색약을 풀어서 시위대를 진압하고 참가자를 색출하려 했습니다.

당시는 죄다 광목으로 된 흰옷 입던 시기였고 마여고 성지여고 학생들 칼라에도 흰색이 들어가있었죠.

그런데 이 소방차가 후퇴하다가 지금의 무학초등학교 인근에서 전신주를 들이받아버립니다.

전깃줄이 끊어지면서 신마산 일대가 몽땅 정전이 되어 버렸는데 때를 같이해서 경찰이 발포를 개시,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증언에 의하면 발포 소리가 지금의 합성동 인근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소음에 가득 찬 현재의 도시가 아니라

농촌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 귀가 멍할 정도로 적막한 곳이긴 합니다만... 마산시청 앞에서 합성동가지는 거의 4~5Km에

구릉 줄기를 두 개 넘어간 지점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군대 사격장 총소리도 산너머까지 들리는데 그럴 법하다 싶고.

총에 맞은 사람들은 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으로 옮겨졌지만 열두 명이 희생된 후였습니다. 시위대에 있던 김용실 군 또한

병원으로 실려왔지만 4시간 후 사망했습니다. 그 와중에 경찰은 영안실 시체 호주머니에다가 "인민공화국 만세" 라고 써 놓은

삐라를 몰래 집어넣다 들키는 병크를 저지릅니다. 나중에 국회 진상조사단에서 밝혀진 유명한 삐라 날조 사건입니다.


발포에 분노한 시민들은 쫓겨가면서도 자유당사나 관공서 파출소에다가 화풀이를 했는데,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가

자유당으로 입당한 허 모 당시 의원의 집도 이 때 똥물세례를 얻어맞습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건 홀라당 불타버린

서성동파출소의 당직 근무자들은 분노한 시위대로부터 털끝하나 안 다치고 무사했다는 건데... 이들은 어느 민주당원의 

집 지하실에 숨어있었던 겁니다. 그 유래가 재밌습니다. 문제의 민주당원은 공안정국 때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을 뻔했는데, 같은 동네 사람이던 그 경찰관이 슬쩍 힘을 써서 간단한 취조만 받고 풀려난 적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시위 현장에서 살아돌아온 그 경남도당원이 집에 와 보니, 자기 아버지가 그 사람들을 숨겨줬었다는 거죠.

"이 사람들이 총을 쏘진 않았잖느냐?" 라며. 반면에 자유당에 정치헌금 하던 사업주들은 그 날 저녁에 불세례를 얻어맞습니다.


3.15의거는 마산시내로 봤을 때는 마산시청에서 자선철교, 불종거리까지의 국지적인 곳에서 일어난 시위였습니다.

지금도 실제로 걸어 보면 30분만에 어른 걸음으로 주파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인데, 위에서 말한 3.15 기념식이 끝난 후

고등학생들은 거리행진을 합니다. 요즘도 기념식은 하긴 할 테지만 거리행진도 하는지는 모르겠군요.

우리 때는 공식 행진이 해산한 뒤에도 그냥 댓거리까지 주우욱 걸어 가서 바로 당구장으로 직행했습니다.(.....)


여튼 3월 15일의 시위는 그렇게 발포로 인한 강제해산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전부터 마산이 수상하다며 국내 언론들과 심지어 해외 통신사들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상황인지라

발포로 인한 사상자 발생은 금세 이슈거리로 떠올랐고 이후 공은 정치권으로 넘어갔습니다. 

경찰 당국은 공산주의자 드립을 치고, 길가던 시민을 잡아서 방화범 누명을 씌우며 6.25때 용공분자 혐의까지 씌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나이가 22세임이 밝혀지자 - 6.25때 초등학생이 공산주의? - 나이를 32세로 다시 올려 발표하는

막장짓을 합니다. (이걸 두고 동아일보는 "사람 나이를 열살이나 올렸다 내렸다 하니 죄 뒤집어 씌우는 건 일도 아니겠네?"

라며 디스를 합니다....) 그리고 이기붕 부통령당선자는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 라는 광역 어그로를 시전하죠. [....]


하지만 마산시내의 흉흉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당장 사상자도 많이 나왔지만, 실종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죠.

그 유명한 고 김주열군입니다. 이 사람은 남원 출신으로, 마산상고 입학이 결정되어 있는 예비 상고생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상고생이 무진장 엘리트였습니다. 노무현대통령 예에서 보듯..) 그런데 행방불명이 되고 나니까

어머니인 권찬주여사는 반쯤 실성한 상태가 되어 온 마산 바닥에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녔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온 마산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알게 되어 버렸습니다. 지인 증언으로는 당시 마산세무서 뒤에 있던 저수지에

빠져죽었다는 소문이 돌아서 물을 몽땅 다 퍼내고 수색작업을 하기도 했다는군요. (후에 바닷속에서 시신이 떠오른 걸

보면 소문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김주열군의 시신은 4월 11일, 현 대한통운 남쪽 부둣가에 떠올랐습니다. 원래는 바다 한복판이던 지역인데

일제시대 말부터 계속 조금조금씩 매립을 진행해서 해안선은 본래보다 500m~1Km 앞까지 뻗어나간 상태였죠.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무런 표식이 없었지만 현재는 시신 인양지점 표식 안내판이 붙어있습니다.

이 안내판에는 인양 당시에 찍은 고 허종 부산일보 기자의 사진이 인쇄된 채 그대로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최루탄이 눈에 박혀있는 채 물때 묻어있는(....) 그게 그대로. 사실 꽤 유명한 사진이라 인터넷 치면 금방 나옵니다.

시신은 부랴부랴 인근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소문은 그야말로 번개처럼 온 마산바닥에 쫙 퍼졌습니다.

심지어 허종 기자 자신도 프락치로 오해받아 좀 위험햇다고 하며, 시위대는 그 길로 바로 도립병원으로 들이닥쳐

경찰 제지를 밀쳐내고 시신을 확인했다고 하죠. 시신이 아직 응급실에서 영안실로 옮겨지기도 전이었다고 하니 

소문 퍼지는 정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알 수 있을 법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근 한달만에 마산을 다시 뒤집어놓습니다.

결국 죽어서 돌아온데다가 너무 명백한 최루탄 ㅡ 심지어 인마살상 우려가 있으므로 직사금지라고 명시된 물건 ㅡ 이

누구의 소행인지, 게다가 은폐까지 하려 했었으니 불을 제대로 당겼던 거죠. 위에도 썼지만 마산사람 성깔 장난없습니다.

그 날부로 바로 시작된 2차 시위는 다음날 부산, 대구 등으로 번졌고 4월 18일에는 서울까지 번져 4.19 혁명의 

직접 도화선이 됩니다. 날짜를 세어 보면 김주열군 시신 인양으로부터 꼭 보름만에 이승만은 하야했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이미지도 있고 해서 시민들이 비교적 안전하게 보내줬지만 ㅡ 실제로 사망 후 시신 귀환 때도

별다른 이야기가 안 나왔습니다. 불과 5년 전에 물러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ㅡ 이기붕의 집은 분노한 동국대 법대생들이 

4.19 당일날 몽땅 박살내놓았습니다. 59학번 노희두 열사가 발포와 동시에 총 맞아 돌아가셨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기붕 집은 서대문이고 동대생들 해산지점은 동대문..ㄷㄷ 종로바닥을 몇 번 왔다갔다했단 얘기.)


여담으로 4.19 혁명이 일단락된 이후에는 엉뚱하게도 부산이나 대구 등지에서 "원정 시위대" 가 넘어왔습니다.

이들에 대한 마산시민들 반응은 "님들 지금 뒷북치고 뭐하는 거임?"(....) 실제로 이 원정시위대들이 좀 은근히

고연/연고전 기차놀이 비슷하게 주변 상점에 민폐끼치고 다니고 한 통에, 원래 마산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이들을 달래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해서 집에 다독거려 보냈다고 하더군요.-_-;;;;;



1960년 이후에는 마산수출자유지역(현 마산자유무역지역), 한일합섬, 창원공단이 들어서는데 이건 또 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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