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문] 늙지 않는 자의 슬픔

2012.06.27 02:22

블루재즈 조회 수:1783

갓 대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의 청년이 위조된 주민등록증으로 편의점에서 담배를 구입하려다가 신고를 받고 온 경찰들에 의해 파출소로 끌려갔다. 미성년자가 담배를 사려고 주민등록증을 위조하였다고 생각한 경찰은 남자의 계속되는 발뺌에 급기야는 역정까지 내고 마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더랬다. 

자신은 담배 연기만 맡아도 구역질을 한다는 남자는, 근처 골목에서 만난 여자애들이 자신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켜서 억지로 담배를 사려고 했노라고 얘기를 한다만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기에는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변조시켜 위조한 주민등록증이 이상한 것이다.

 

계속되는 남자의 어처구니 없는 말에 흥분을 참지 못한 젊은 경찰이 청년의 멱살을 쥐자 나이 지긋한 다른 경찰이 서둘러 젊은 경찰을 말린다. 멱살을 놓은 뒤에도 남자를 두들겨 팰 것처럼 인상을 쓰며 씩씩거리던 다혈질 젊은 경찰이 끌려나가듯 밖으로 나가자 남자가 입을 연다.

"어이쿠, 깜짝 놀랬소이다. 오줌을 지릴 뻔 했구려."

동글동글한 얼굴의 청년은, 의자에 기대 앉아 영락없는 노인네 같은 말투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겉으로는 이렇게 보이지만 자신은 사실 예순이 넘었노라고. 자신의 외모 때문에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앞자리를 긁어 바꾼, 위조된 주민등록증을 갖고 다닌다는 믿지 못할 얘기가 남자의 입에서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허리도 무릎도 위장도 방광도 나이 들어 성하지 않다는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모습만은 앳된 청년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 주황색 그린조이 반팔 티에 밑단이 살짝 헤진 게스 바지, 유행이 10년은 훌쩍 지난 이스트팩 갈색 백팩에 푸른색 나이키 운동화까지 딱 20대 학생의 모습이었다. 뱃살이라도 없었다면 남자는 영락없이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정도로 보일, 어쩌면 고3이나 재수생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다. 편의점 주인이 신고를 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동안이었다.

정말이냐고 반문하는 경찰에게 그나마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은 아랫배 뱃살이라도 있기 때문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남자다. 하긴, 표준 체중은 이미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 영락없이 복부 비만으로 보이는 뱃살이 그나마 남자의 나이를 들어보이게 만든다.

얼마 전까진 동네 마을 버스에 현금을 넣고 타면 버스기사 딴에는 눈치 꽤나 있다고 자부하는지 중고생 요금으로 거스름돈을 내려주기 일쑤였다고, 뱃살이 나온 뒤로는 그나마 대학생 쯤으로 봐주는지 요금 계산이 제대로 되더라고 남자가 이야기를 계속 한다.

군대는 갔다 왔냐고 경찰이 떠보자 남자는 군대 갔다 온지는 오래 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언제였나. 그때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 본 영화가 남정임이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였노라고 남자가 오래 되고 오래 된 지난 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최진실이가 불쌍하게 죽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남정임이가 더 불쌍해."

남자가 옛 이야기를 슬슬 풀어놓는다. 당시에는 집안에 돈이 있어서 편하게 군생활을 했노라고 남자는 묻지 않은 얘기까지 한다. 당시는 그런 것이 당연히 여겨지는 시대였노라고. 남진이 같은 유명짜한 애들이야 남들 이목 때문에 총알 날라오는 베트남도 갔다 오고 했지만 자기 같은 사람은 그렇지 않았노라고, 하지만 그래도 군대는 군대라서 그때 아프기 시작한 허리 때문에 지금까지도 고생이라고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아버지는 뭐하시던 분이냐고 나이 지긋한 경장이 내친 김에 물어보니 한국전쟁 전에 일본에 자리잡고 있던 무역상으로 갓 해방된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떼돈을 벌게 된 일본인들과 더불어 사업을 했노라고 그래서 종전 한참 후에야 귀국하였노라고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온다.

신성일이가 주인공을 맡았던 '맨발의 청춘'이란 영화 그거 일본 영화를 베낀 거야. '흙탕 속의 순정'이라고 일본 영화를 하나하나 베낀 거지. 내가 그때 일본에서 그 영화를 몇 번이나 봤었는데 그걸 모를 수 있나. 내가 공부 머리가 없어서 지금도 일본어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풍류는 좋아했지. 영화란 것도 풍류의 일종 아닌가. 말은 제대로 못 알아들었지만 화면 하나 음악 하나가 지금도 생생해. 그때 아주 극장에서 살았지. 살았다구.

그때 내가 가던 그 극장에 귀하게 생긴 도련님 하나가 주말이면 오곤 했었지. 걔가 바로 지금 삼성 회장 이건희야. 나는 평일부터 주말까지 일주일 내도록 극장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걔는 휴일에만 극장에 오더라구. 부티나게 생긴데다가 한국말을 한 마디도 안해서 영락없이 일본 도련님인줄 알았지 뭔가. 그때만 해도 왜놈들 속에 살 땐 조선사람인 것을 알아도 서로 모른 척 해줄 때였으니 이건희인줄 알았어도 어지간해선 모른척 했을 거야. 역도산, 리키도쟌도 그때 그랬지 않았나. 겉으로는 모른 척 아닌 척 할 때였어.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장훈 정도가 특이한 케이스였지.

그때만 해도 이병철, 이건희가 부럽지 않았어. 돈이란 평생 쓰고도 남을 줄알았는데, 사람 인생이란 모를 일이야. 일본인들과 사업을 하다가 이후에 대만 화교들과 사업을 많이 했는데 박통 때 화교 자본을 견제하면서 그 많던 돈이 반토막이 나버렸고, 최무룡이, 김진규 끝물에 영화니 뭐니 제작에 손을 댔다가 말아먹고, 5공 때 딴에는 정의사회 구현하겠노라고 야당 의원 지원했다가 혼찌검이 나고 이후에 IMF니 은행 퇴출이 뭐니 해서 남아있던 재산도 다 거덜났지 뭔가.

평생 돈 쓸 줄만 알았지 벌 줄은 몰랐고 돈 쓰느라 공부도 안 해 머리에 든 것도 없으니 돈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지. 몸은 아프니 험한 일은 못하고 생긴 게 이러니 나이값 할만한 일도 찾을 수가 없었다네. 파지 주워 고철상에 넘기는 일을 심심파적 삼아 해보려고 했는데 어디 나이도 어린 놈이 먹고 할 짓이 없냐고 텃세가 대단하지 뭔가. 호적으로 따지면 나보다 어린 놈들이 술을 한 잔씩 걸치고는 우루루 몰려 오는데... 그것 참 어려서 금수저 은수저 입에 물고 있었던 내가 할 일이 아니더라구,

삼일이나 했나, 일주일도 못했지. 그나마 마지막 날은 구루마 끌다가 허리를 삐끗해서 일주일 이상 누워있었지. 구루마는 버려두고 그 길로 자리에 누웠다네. 애꿎은 구루마 값만 날린 셈이었어. 이 얼굴로 해선 병원도 제대로 못 가. 병원 접수하면 새파란 간호사 애들이 얼마나 쳐다보는지 말야. 젊은 애가 어른 대신 왔다고 본인이 직접 와야 된다고 한단 말이지.

그럴 때면, 아들 놈이 늙으신 아버지 대신 왔는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되나요. 급한데... 이러게 된다구. 싹싹 빌듯이 눈물까지 짜내며 젊은 효자 연기를 해야된다 말이지. 나이 육십 먹고 할 짓이 아니지. 정 급할 때는 의료보험증 내지 않고 그냥 치료 받아. 쌩돈 더 들이고 말야.

자주 가는 단골 개인 병원이 있는데 거기 접수받는 간호사가 이제는 나를 알아. 그래서 아플 때는 거기만 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고 아버지가 몸이 많이 불편해서 아들이 대신 온다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자기 딴에는 백의의 천사라도 된 듯 인심을 쓰지.

그래도 먹고 살만은 해. 아래 위층 세주고 그 세 받아서 살지. 살만큼 살았으니 죽는 날까지 그 돈이면 어느 정도 살 수는 있을 거야. 예전처럼 스위스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파리로 비행기 타고 놀러 다니지는 못하지만.

아, 참 김현희라고 자네도 알지? 경찰이니까 그 정도는 알 것 아닌가. 그때 김현희가 폭탄 터뜨린 칼기에 내가 탈 뻔 했었다네. 아니, 아니. 소련 영공에서 미사일 맞은 건 다른 칼기고, 폭탄 터뜨린 칼기는 또 다른 칼기야. 그나마 남아 있는 돈으로 한참 해외여행 다니면서 놀고 있을 때였는데 로마였나 어디였었나 이름 모를 식당에서 사먹은 치즈가 상했었는지 배탈이 났지 뭔가. 일정 모두 취소하고 호텔 방에 틀어박혀 끙끙 앓았지. 밑구멍에서 똥물이 새는데 베르사이유건 바스티유건 바로크건 로코코건 눈에 들어오겠나 말이지. 지금이야 말할 수 있지만 그때 내가 묵었던 호텔 방 카페트에도 똥물이 제법 튀었다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셈이지만. 지금도 큰 마트 같은 데서 그때 먹은 구라파 치즈 비슷한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로워. 배탈은 크게 났었지만 그때 그 현지에서 먹은 치즈가 참 맛있었지. 다시 먹으라면 못 먹겠지만 말이야. 국내에서 팔고 있는 것들이야 장기보관을 위해 보존제가 들어 있는데다가 냉동 보관되어서 제 맛이 안 나와. 그게 무슨 맛이야? 냉장고 맛이지. 치즈는 따끈따끈 온기가 남아 있을 때 먹어야 돼. 한 번 냉동되면 그 풍미는 날아가 버린다네.

아까 남정임이 얘기를 했지. 남정임이 문희, 윤정희 걔네들이 나랑 비슷한 또래야. 그래서 남정임이 죽었을 때 많이 슬펐지. 윤정희는 다 늙어서 영화에 나오더군. 난 안봤어. 걔가 예전에 얼마나 깜찍했는데 말이야. 쪼글쪼글해서 나오니 못 보겠더라구.

걔네 트로이카는 아니지만 '고은아'라고 아는지 모르겠어. 고은아는 곱게 늙었더라구. 믿음이 좋아서 그런가 아주 곱게 늙었어. 늙을수록 종교는 가지는게 좋지. 문희 말고 방희라고 희자 돌림 여배우가 있었는데... '
날 보러 와요' 그 가수 방미 말고 방희. 젊었을 땐 제법 야한 영화에도 나오고 했는데 얼마전 아침 방송을 보니 살이 많이 쪘더라구. 살은 쪄도 마음은 편한지 인상이 좋아 보였어. 걔도 이제 종교인이 다 되었어.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 얘네 트로이카는 이름을 들어봤다구? 반갑구만. 유지인이는 요즘 주말 텔레비전에 나오는데 젊은 시절에는 인상이 아주 깍쟁이 같았어. 정윤희는 촌닭 같은 역할도 하고 얼굴에 흙칠도 하고 하더니만 요즘은 아주 귀부인이 되어 산다는데 제일 깍쟁이 같고 똑똑해보이는 유지인이가 푼수 같은 역할로 안방극장에 나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그래도 열심히 사니 보기가 좋아.

 

아, 개인적으로는 나는 셋 중에서 정윤희 팬이야. 아주 근사했지. 생긴 게 예술이었어. 성녀 같다가도 속녀 같고 순진한 산골 어린 계집 같다가도 남자를 홀리는 요녀 같은, 그런 이중적인 맛이 있었어. 셋 중에서 정윤희가 몸매가 가장 좋기도 했지. 걔가 벗기도 제일 많이 벗었구.

 
그런데 영화적으로 따지면 장미희 영화가 그 시절을 대표하는 영화가 아니었나 싶어. 배창호가 만든 '깊고 푸른밤' 그 영화를 극장에서 몇 번이나 봤는지 몰라. 앉은 자리에서 몇 번이곤 보고 또 봤지. 나중에는 허리가 아파서 스크린 앞 바닥에 누워 봤지. 그래도 좋더라구.

그때는 표 한 번 끊고 극장 밖으로 안 나오면 그만이었어. 앉은 자리에서 계속 봤지. 손님이 있어야 영화가 재미있단 입소문이 난다고 어지간해선 일부러 안 쫒아내는 극장도 있었다구. 극장 안에서 영화 보며 담배 피던 시절이니 옛날은 참 옛날이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까지는 아니라도 영화 보며 담배 피던 시절이란 말이지. 골초 몇 놈 들어오면 극장 안이 담배 연기로 자욱했어. 눈이 매웠지. 너구리굴, 그래 너구리굴이었어. 나같이 담배 연기에 약한 사람은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구. 그럴 때면 영화도 뭐고 그냥 나와버렸어.

나야 뭐 극장주와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이였으니 청소하는 애들이며 구두 닦는 애들이 꾸벅꾸벅 나한테 인사를 했지. 물론 그때도 처음 보는 직원은, 대가리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놈이 어디 어른 영화를 보냐고 혼쭐을 내려고 했지. 학교도 안 가고 이거 뭐하는 놈이냐고 호통을 치는 놈도 있었다네. 아까 그 경찰 친구 같은 사람을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야. 다 예전에 여러 번 겪은 일이지. 그래도 그때는 나이 때문에 시비가 붙으면 주먹질도 하곤 했는데 요즘은 깜짝 놀라면 오줌부터 찔끔 지리고 만다네. 얼굴만 젊었지 몸 구석구석 늙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요즘 사람들은 장미희만 나오면 똑 사세요  똑 발음이 어떠니 이순자가 어떠니 하면서 흠집을 낸다는데 여배우로서 장미희만한 애가 없었어. 내가 감독이라도 장미희를 썼을 거야. 날선 검 같았지. 잘 날 선. 장인이 만든 명검이 그런 게 아니겠나.
슬픈 일이야. 나이 들어서, 젊었을 때 일을 기억 못하는 어린 사람들에게 욕을 듣는다는 것이.

그땐 정윤희 사생활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했어. 톱 여배우가 간통이니 뭐니 해서 깜빵에 갔으니 말이야. 그 정윤희가 트로이카 중에서 결혼 생활, 남녀 문제에 있어 지금까지 제일 성공했으니 세상 일이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아, 정윤희 아들에게 그런 일이 있었군. 안타까운 일이야.

아까 그 담배 말이지. 내가 피우려는 것은 아니야. 머리 노랗게 물들인 젊은 여자애들이 내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더라구. 이 늙은 나에게 말이야. 나란 사람은 담배 냄새도 못 맡는 사람인데 말이지.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거의 안마시고 물을 많이 마시고 그게 내 건강 비법이라네. 그런다고 누구나 나처럼 어리게 보일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만. 암튼 걔네들 대여섯 명이 우루루 몰려와서 침을 찍찍 뱉으며 돈 3천원을 내 손에 쥐어주고는 담배 한 갑 사오라더구만. 남는 돈은 나보고 하라고 하며 말이지. 요즘 담배 한 갑 얼만가? 담배를 안 피니 가격을 알 수가 있나. 어이쿠, 그래도 양심은 있는 애들이었구만.

어린 애들에게 왜 담배를 사줄 생각을 했냐구? 그런 애들, 살아있을 필요가 있나? 담배 피우고 빨리 죽는게 더 낫지 않아? 그런 애들. 삐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나이 되면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네. 길게 사는 것보다 빨리 죽는게 더 나아. 젊었을 때, 화려할 때 말이지.

오래 살다 보니 이상한 재주만 늘어나게 되지. 가끔은 내 자신이 공중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느낌이 들어. 내가 아직 살아있는지 어쩌면 혹시 지금 죽어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착각도 하게 되지. 그냥 잔영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야.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고 말야. 그럴 땐 가끔 확인하고 싶어지지.

그럴 땐 말이야. 젊은 애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고 있으면 그때 비로소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네. 젊은 애들이 예상보다 일찍 죽어 저승의 명부에 이런저런 오차가 생기게 되면 나 같은 놈의 수명이 연장되는 셈이 아닌가 싶어. 남의 죽음을 통해 내가 그만큼 젊어지는 거지.

아까 그 경찰 말이야. 박길홍이. 26살. 그 친구 그런 식으로 함부로 행동하단 제 명에 못 죽는다네. 그러면 그만큼 내 수명이 늘어나는 셈이야. 어떻게 알긴? 그냥 다 아는 수가 있다네. 이름, 나이 같은 건 훤히 보이지. 동생 이름이 박진규, 만으로 22살. 한달 쯤 전에 술 먹고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로 즉사했지 말이야....

어지간히 얘기를 했는지 노인 아닌 노인이 말을 마치고 물을 찾아 정수기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파출소 밖으로 나갔던 아까 그 젊은 경찰이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여학생 몇 명을 잡아끌듯 경찰서로 데리고 들어온 것은. 다혈질적인 신참 순경 녀석이 어찌나 우악스럽게 대했는지 양아치 같은 여자애들이 제법 얌전해져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혼쭐이 제대로 난 모양이다.

"경장님, 아까 그 학생에게 담배 사달라고 심부름 시킨 애들이 얘들입니다."

파출소 안의 경찰들이 조금 전까지 파출소 의자에 기대 앉아 쉴새없이 지난 날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젊은' 노인을 찾아보았지만 어느새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는 처음 파출소에 들어왔을 때 젊은 경찰의 갑작스럽고도 억센 멱살잡이에 놀라서 지린 오줌으로 추정되는, 노란 액체만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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