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27 02:22
그런데 영화적으로 따지면 장미희 영화가 그 시절을 대표하는 영화가 아니었나 싶어. 배창호가 만든 '깊고 푸른밤' 그 영화를 극장에서 몇 번이나 봤는지 몰라. 앉은 자리에서 몇 번이곤 보고 또 봤지. 나중에는 허리가 아파서 스크린 앞 바닥에 누워 봤지. 그래도 좋더라구.
그때는 표 한 번 끊고 극장 밖으로 안 나오면 그만이었어. 앉은 자리에서 계속 봤지. 손님이 있어야 영화가 재미있단 입소문이 난다고 어지간해선 일부러 안 쫒아내는 극장도 있었다구. 극장 안에서 영화 보며 담배 피던 시절이니 옛날은 참 옛날이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까지는 아니라도 영화 보며 담배 피던 시절이란 말이지. 골초 몇 놈 들어오면 극장 안이 담배 연기로 자욱했어. 눈이 매웠지. 너구리굴, 그래 너구리굴이었어. 나같이 담배 연기에 약한 사람은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구. 그럴 때면 영화도 뭐고 그냥 나와버렸어.
나야 뭐 극장주와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이였으니 청소하는 애들이며 구두 닦는 애들이 꾸벅꾸벅 나한테 인사를 했지. 물론 그때도 처음 보는 직원은, 대가리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놈이 어디 어른 영화를 보냐고 혼쭐을 내려고 했지. 학교도 안 가고 이거 뭐하는 놈이냐고 호통을 치는 놈도 있었다네. 아까 그 경찰 친구 같은 사람을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야. 다 예전에 여러 번 겪은 일이지. 그래도 그때는 나이 때문에 시비가 붙으면 주먹질도 하곤 했는데 요즘은 깜짝 놀라면 오줌부터 찔끔 지리고 만다네. 얼굴만 젊었지 몸 구석구석 늙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요즘 사람들은 장미희만 나오면 똑 사세요 똑 발음이 어떠니 이순자가 어떠니 하면서 흠집을 낸다는데 여배우로서 장미희만한 애가 없었어. 내가 감독이라도 장미희를 썼을 거야. 날선 검 같았지. 잘 날 선. 장인이 만든 명검이 그런 게 아니겠나.
슬픈 일이야. 나이 들어서, 젊었을 때 일을 기억 못하는 어린 사람들에게 욕을 듣는다는 것이.
그땐 정윤희 사생활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했어. 톱 여배우가 간통이니 뭐니 해서 깜빵에 갔으니 말이야. 그 정윤희가 트로이카 중에서 결혼 생활, 남녀 문제에 있어 지금까지 제일 성공했으니 세상 일이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아, 정윤희 아들에게 그런 일이 있었군. 안타까운 일이야.
아까 그 담배 말이지. 내가 피우려는 것은 아니야. 머리 노랗게 물들인 젊은 여자애들이 내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더라구. 이 늙은 나에게 말이야. 나란 사람은 담배 냄새도 못 맡는 사람인데 말이지.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거의 안마시고 물을 많이 마시고 그게 내 건강 비법이라네. 그런다고 누구나 나처럼 어리게 보일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만. 암튼 걔네들 대여섯 명이 우루루 몰려와서 침을 찍찍 뱉으며 돈 3천원을 내 손에 쥐어주고는 담배 한 갑 사오라더구만. 남는 돈은 나보고 하라고 하며 말이지. 요즘 담배 한 갑 얼만가? 담배를 안 피니 가격을 알 수가 있나. 어이쿠, 그래도 양심은 있는 애들이었구만.
어린 애들에게 왜 담배를 사줄 생각을 했냐구? 그런 애들, 살아있을 필요가 있나? 담배 피우고 빨리 죽는게 더 낫지 않아? 그런 애들. 삐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나이 되면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네. 길게 사는 것보다 빨리 죽는게 더 나아. 젊었을 때, 화려할 때 말이지.
오래 살다 보니 이상한 재주만 늘어나게 되지. 가끔은 내 자신이 공중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느낌이 들어. 내가 아직 살아있는지 어쩌면 혹시 지금 죽어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착각도 하게 되지. 그냥 잔영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야.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고 말야. 그럴 땐 가끔 확인하고 싶어지지.
그럴 땐 말이야. 젊은 애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고 있으면 그때 비로소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네. 젊은 애들이 예상보다 일찍 죽어 저승의 명부에 이런저런 오차가 생기게 되면 나 같은 놈의 수명이 연장되는 셈이 아닌가 싶어. 남의 죽음을 통해 내가 그만큼 젊어지는 거지.
아까 그 경찰 말이야. 박길홍이. 26살. 그 친구 그런 식으로 함부로 행동하단 제 명에 못 죽는다네. 그러면 그만큼 내 수명이 늘어나는 셈이야. 어떻게 알긴? 그냥 다 아는 수가 있다네. 이름, 나이 같은 건 훤히 보이지. 동생 이름이 박진규, 만으로 22살. 한달 쯤 전에 술 먹고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로 즉사했지 말이야....
어지간히 얘기를 했는지 노인 아닌 노인이 말을 마치고 물을 찾아 정수기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파출소 밖으로 나갔던 아까 그 젊은 경찰이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여학생 몇 명을 잡아끌듯 경찰서로 데리고 들어온 것은. 다혈질적인 신참 순경 녀석이 어찌나 우악스럽게 대했는지 양아치 같은 여자애들이 제법 얌전해져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혼쭐이 제대로 난 모양이다.
"경장님, 아까 그 학생에게 담배 사달라고 심부름 시킨 애들이 얘들입니다."
파출소 안의 경찰들이 조금 전까지 파출소 의자에 기대 앉아 쉴새없이 지난 날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젊은' 노인을 찾아보았지만 어느새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는 처음 파출소에 들어왔을 때 젊은 경찰의 갑작스럽고도 억센 멱살잡이에 놀라서 지린 오줌으로 추정되는, 노란 액체만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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