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권] 치유하는 글쓰기 - 박미라

2012.07.05 12:54

being 조회 수:2477



025. 치유하는 글쓰기


듀게에서 자조모임(?) 비슷한 것을 만들게 되면서, 그 모임 프로그램 일환으로 자기치유 글쓰기 모임을 위한 정보 조사 차원에서 읽은 책. 하지만 책 속에는 '혼자서 해보는 12주 코스 자기치유 글쓰기 프로그램' 같은 것은 없었다. 아주 큰 아쉬움.


하지만 다른 것은 좋았다. 특히 이 책은 자기치유 글쓰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들은 어떻게 해 냈는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입문서다. 우선, 에세이 형식으로 쓰여 있기 때문에 잘 읽힌다. 전직 출판사 편집자였던 저자의 필력도 괜찮다. 그렇게 편하게 읽어나가다 보면, 자기치유 글쓰기를 위해 꼭 필요한 마음가짐들이 머릿속에 쏙쏙 박힌다. 모든 글은 진정한 의미에서 소중하며, 자신의 고통과 감정은 언어로 발설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고통 그 자체와 직면하는 것이 곧 치유라는 것. 그리고 초보자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하는지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죽도록 미운 당신에게', '셀프 인터뷰', '미친년 글쓰기' 등등. 그리고 이 책 속에는 해당 주제들로 자신의 고통을 풀어낸 사람들이 직접 쓴 글들이 빼곡히 실려 있다. 정직하게 말하면, 저자의 좋은 말들보다 정말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고통이 절절히 담긴 글들을 읽는 것이 더 좋았다. 훨씬 직접 와 닿는다. 아, 이렇게 쓰는 거구나. 이런 식으로 자신을 풀어내는 거구나. 나도 써보고 싶다. 나도 풀어놓을 것이 너무 많아...


글쓰기의 치유 효과는 직접 경험 중이다. 내 우울증 경험을 꾸준히 써 내려가다 졸지에 책까지 내기도 했거니와(-_-), 요새 매일 쓰는 프리라이팅 (혹은 모닝페이지. 자유연상기법에 따라 1~3페이지 정도 끊임없이 써가기를 매일 같이 하는 것. 자신을 빼면 그 누구도 보지 않을 글이다. 사실 자신도 안 본다.)과 자기치유 글쓰기 모임의 글쓰기를 통해, 제대로 직면하지 못했던 내 문제들을 하나하나 직면하면서, 그 과정이 얼마나 치유적인지 새삼 실감한다. 난 내 인생의 최악의 응어리들을 상담사와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누군가는 할 말 못 할 말을 상담사에게 혹은 명상 스승에게 또는 믿음이 가는 신부,수녀님에게 다 한다고 하던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많은 인생의 꼬임들을 충분히 들어주고 같이 해결해 갈 좋은 상담사와 장기간 상담을 할 수 있는 돈도 없다. 그렇지만 몇 년은 족히 풀어내고 정리해야 할 나의 이야기들을, 종이에 대고는 쓸 수 있다. 펜과 종이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과거를 그리고 현재를 피하지 않고 제대로 직면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처음 글을 쓸 때는 잘 안 되었다. 내 글버릇 대로 표피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내가 지금까지 직면한 정도까지만 반복해서 써 내려가거나, 새로운 고통을 파 들어갈 때도 추상적인 문장으로 묘사하고 끝내곤 했다. 되도록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방어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글을 쓰다 보면 저절로 내면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 과정은 괴롭고 고통스럽다. 때로는 글을 쓰다 너무 울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붓기도 하고, 글을 쓰고 난 직후부터 시작되는 끔찍한 우울함과 불안감에 시달리다 한동안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직면하기를 계속하면, 뭔가 조금씩 다듬어지는 느낌이 든다. 머릿속을 미친 듯이 싸돌아다니는 과거의 편린들, 저 깊이 묻어두고 외면하던 각종 감정들을 충분히 생각하고 느껴주고 직면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은 조금씩 덜 고통스러워진다. 다시 그 일이 떠올라도 예전처럼 죽을듯 괴롭지 않아진다. 과거에는 그것들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힐지 몰라 경계를 바짝 세우고 살아야 했는데, 그 일들을 직면하고, 그래서 고통이 조금씩 옅어지면서, 경계심도 조금씩 풀린다. 그래서 덜 민감해지고, 예전에는 진저리가 나서 쳐다보지도 못했던 것들도 조금씩 편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세상 사는 게 좀 더 편해진다. 그리고 가끔은 통찰을 얻기도 한다. 상담사가 해주어야 할 그런 통찰이, 고승이나 인생의 스승이나 들려줄 법한 그런 통찰이, 내 머릿속에서 나온다. <아티스트웨이>의 저자는 그런 영감을 '신'의 것이라 표현했는데, 확실히 자기 것 같지는 않다. 평소 자신의 생각 패턴과 너무 다르고, 수준도 훨씬 높은 영감들이 툭 떨어진다. 그럴 때면 황홀해진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 책의 좋은 점 또 하나. '치유하는 글쓰기 모임'을 지도하는 사람이 쓴 글이라, 여러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주의해야 할 점도 세심하게 집어준다. 내 고통을 발설할 대상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타인의 고통을 들어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들어야 하는지. 특히 모임을 진행하기 전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 중 하나는 이런 거였다. '다른 사람의 우울하고 괴로운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내 정신이 괜찮을까? 우울함이 더 옮지 않을까?' 사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굉장히 정신 에너지 소모가 많은 활동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잃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 제대로 된 태도로 듣기만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 타인의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지 말 것. 죄책감(?)도 가지지 말 것. 그냥 잘 들어줄 것. 그리고 충분히 느껴줄 것. 그것만 하면 된다. 듣다 보면 내 문제와 패턴이 비슷한 사연이 있을 때가 있다. (많다-_-) 그러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싶은 마음에 안도감이 생긴다. 그리고 그런 고통에 공감하는 와중에는 크게 힘들지 않다. 오히려 공감할 때마다 (말로 꺼내든 혼자 속으로 생각하든 상관 없다.) 자기 자신에게 애정어린 연민을 보내는 느낌이 되곤 한다. 또, 어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머릿속에 부정적인 감정이나 각종 욱함이 떠오를 때도 있다. 과거 내가 경험했던 사람의 사례부터 그냥 불편한 감정까지. 이런 생각들을 가만히 관조하다 보면, 거기에서 나에 대한 통찰을 얻곤 한다. '아..나는 이런 것을 정말 싫어하는구나. 이 부분이 나의 아킬레스건이구나.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데. 지금까지 내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겠구나.' 타인의 고통을 듣는 것은 괴롭고 힘들 때도 잦지만, 얻는 것이 더 많았다. 적어도 나는. 


마지막으로 이 책의 좋은 점. 책 말미에 실린 '치유하는 글쓰기에 도움되는 책들'리스트가 아주 실하다. 그 리스트 중 10권 정도 들춰봤는데 (다 읽지는 않고, 빌리거나 사기만 했다.) 다들 참 좋은 책이었다.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다.


사실 이런 책은, 읽는 것만으로는 그 진가를 알지 못한다. 책에서 예시를 보여주는 대로, 자신이 직접 써봐야 한다. 내 경우도, 읽기만 할 당시에는 사실 큰 감흥이 없었다. '좋은 소리구나. 맞는 소리야. 그런데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서 다 아는 소리지. 뭐 그렇네.' 하지만 직접 글을 써보면서 중간 중간 책을 들춰보면서 새삼 느낀다. '음. 진.짜. 맞는 소리네.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몰랐던 거였어.' 역시 머리로 아는 것은 별 쓸모가 없다. 직접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은 직접 자기치유 글쓰기를 '해보고' 싶은 초보자들에게 상당히 괜찮은 입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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