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문] 블레이드 커터 살인사건

2012.07.07 05:56

블루재즈 조회 수:1730

영화감독 윌리엄 올리비에는 몇 편의 걸작 영화를 영화사에 남긴 뛰어난 감독으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가 바로 '블레이드 커터'였다. 블레이드 커터의 내용인즉, 로마 노예의 반란과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살인청부업자에 관한 것으로,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살인청부업자 막시무스 역은 명배우 해리슨 포드, 그에게 노예 제거 명령을 내리는 로마 귀족 크라수스 역은 크리스토퍼 워켄, 노예 반란의 주동자인 검투사 스파르타쿠스 역은 룻거 하우저가 맡았더랬다.

 

무희 노예, 창녀 노예, 검투사 노예까지 하나둘 제거해나간 막시무스는 마지막 제거 대상자인 스파르타쿠스를 만난다. 막시무스와 스파르타쿠스의 맞대결이 이뤄지나 검투술로 달련된 스파르타쿠스의 힘에 막시무스는 속수무책이다. 크라수스의 대군 동원으로 인해 노예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로마로 들어가는 아피아 가도는 십자가에 매달린 노예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진다.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노예들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인간 횃불은 저 멀리 산 위에서 막시무스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스파르타쿠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반란이 실패로 끝나고 수많은 노예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을 안 스파르타쿠스는 (같은 노예 신분인) 막시무스를 구해주고는 짧은 생을 끝마쳤다. 반란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키워진 막시무스는 신분을 숨기고 양민 행세를 하던 여자 노예 리디아와 함께 먼 길을 떠난다.

 

아무튼 그러한 내용의 '블레이드 커터'는 윌리엄 올리비에 감독의 '저주받은' 걸작으로 남아 있는데 윌리엄 감독은 이 '블레이드 커터'를 2014년까지 리메이크하여 개봉하겠다고 선언한다. 칠십 중반을 넘어선 팔순을 바라보는 노감독의 행보로선 대담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평소 작품을 다 찍을 때까진 배우들의 사사로운 인터뷰며 스토리 유출을 극구 꺼리는 그가 이번에는 영화 촬영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배우들의 인터뷰며 작품의 제작 동기, 여러가지 각본의 차이점 등을 공개하고 나선 것은 보기드문 것이었다. 

 

가네다가 아닌 '긴'으로 불러주길 원하는 사설탐정 '긴' 선생과 긴 선생의 일화를 소설로 빚어내어 공전의 히트를 친 유명 추리 소설가 미사키 여사가 미국 LA 땅에 도착하였다.

제보자와 소설가 이상의 친밀한 우정을 쌓고 있는 이들은 한류 스타 이병헌의 할리우드 신작 시사회를 보기 위해 미국까지 날아온 것이다. 자이니치(在日)이라고 스스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가네다(金田)가 아닌 '긴(金)'으로 자신을 불러달라는 긴 선생이니만큼 한류 스타에 대한 호감은 그 마음 한 곳에 있어 이병헌을 보기 위해 동행을 원하는 미사키의 요청에 흔쾌히 청했던 것이다. 미국 LA 코닥 극장에서 이병헌이 공동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RED 2' 시사회 상영을 하루 앞두고, 동반 1인의 시사회 티켓을 가지고 있던 미사키 여사는 들뜬 마음이 되었다.

 

호텔 앞을 산책하는 두 사람은 미국 사람들의 얼굴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음을 대화의 소재로 삼는다. 살만 루시디, 스탠리 큐브릭이 비슷하게 생겼다고 미사키 여사가 토로하자 움베르토 에코도 닮아보일 때가 있다고 긴 선생이 맞장구를 친다. 이래서 긴이 좋은 것이다. 남편이었다면 '바가야로' 소리나 나오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은 이야기건만 긴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받아주는 것이다. 긴이 이야기를 덧붙인다.

"인간의 인식이란 특정 이미지로 사람을 구별하죠. 특정 이미지는 몇가지 기호로 구성되어 있는데 벗겨진 이마와 동그란 안경, 덥수룩한 수염, 지적이다 못해 괴퍅해보이기까지 한 눈매까지 겹치면 살만 루시디, 스탠리 큐브릭은 비슷하다고 볼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사실 우리 기억에 남은 대표적인 사진, 즉 이미지가 비슷할 뿐이지 실상 살만 루시디와 스탠리 큐브릭은 다른 사람이지요. 사진을 좀 더 찾아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에는 비슷하게 어쩌면 똑같이 느껴지는 것은 그 특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 상호간의 인식 코드 말이죠."

 

 

일본에서 유명한 인물이 미국에 왔다는 소식에 여기저기 초대하는 이들이 있다. 노예 반란을 다룬 '블레이드 커터'와 신화를 다룬 '피그말리온' SF 공포물 '스페이스 스트레인저' 등의 작품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윌리엄 올리비에의 작업실로 초대한 것은 새로 리메이크되는 '블레이드 커터'의 제작을 맡은 영화사의 일본계 재무담당이었다. 재무담당과 영화사 사장, 조감독, 윌리엄의 동생 조나단, 긴과 미사키 등 여러 사람이 윌리엄 감독의 작업실을 방문하였을 때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쓰러진 채 차갑게 굳어진 윌리엄의 시체였다. 동생 조나단이 형의 죽음을 확인한다.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영화계의 거인이었던 고인을 추모하려는 그때 '긴'이 고함을 지른다. "이 안에 범인이 있다. 범인이 있다고!"

 

'긴'은 범죄현장에서 늘 그래왔던 것이고 그에게 있어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버린 행동이지만 직접 눈 앞에서 보니, 게다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법조체계도 다른 이들과 함께 있다보니 함께 있는 미사키 여사로서는 그런 긴의 행동이 적이 민망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긴의 추리가 그럴듯 하다고 느껴진다. 추리소설 전문작가로서의 감이랄까, 왠지 모르게 이 죽음은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마치 짜맞춘 것처럼 여기 모인 사람들을 보라. 이 불황의 시대에 윌리엄 감독의 광기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될 조감독, 영화사 고위간부로부터 제작비를 절감하라는 채근에 시달리지도 않게 될 영화사 재무담당이며 거액을 들여 제작한 전작의 실패로 인해 윌리엄 감독과 큰 불화를 겪었던 영화사 사장, 윌리엄이 죽을 경우 그가 남긴 영화 판권의 1차 소유주가 될 조나단 올리비에 감독까지 긴과 미사키를 제외한, 여기 모인 이들은 전부 다 윌리엄이 죽을 경우 혜택을 볼 사람들이었다.

 

'긴'의 추리에 은근히 동의를 하면서도 한 편으론 초상집에 재를 뿌리는 것 같아 민망해질 즈음, '긴'이 작업실 책장에 있는 82년작 '블레이드 커터'의 DVD를 꺼내들었다.

"이게 윌리엄을 죽였지요. 원작보다 더 잘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의 심장을 멈췄을 겁니다."

긴의 짧은 설명에 주위 사람들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윌리엄의 작업실을 나서는 긴이 미사키의 팔목을 붙잡는다. 곁으로 다가온 미사키에게 긴이 일본어로 속삭인다.

"이렇게 되는 편이 좋을 거에요. 윌리엄에게도, 우리에게도, 모두에게도."

 

호텔로 돌아간 긴과 미사키, 긴은 미사키에게 미안하다는듯이 말을 꺼낸다.

"내일 시사회 대신 급히 갈 곳이 생겼어요. 어쩌면 그게 더 재미있을 지도 모르구요."

긴은 서둘러 로마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코닥 대신 로마인가요?" 미사키가 긴에게 묻지만 긴은 대답하지 않은 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조용히 웃기만 했다. 혼자만 비밀을 알고 있을 때 긴 특유의 표정이었다. 긴은 비싼 돈을 들여 퍼스트클래스 티켓을 구입했다. 미국으로 올 때만 해도 비지니스클래스 좌석을 이용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미사키가 긴의 얼굴을 쳐다보자 긴이 말없이 웃기만 한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나자 긴이 입을 연다. 

 

"윌리엄 감독의 초기작 스페이스 스트레인저에 성적인 코드가 엄청 많이 심어져 있었던 것 기억나시죠?"

"우주선이 여성의 자궁을 모티브로 디자인되었고 괴물의 주둥이가 남성의 성기 모양이었던 것이 유명하지요. 강간 코드도 숨겨놓았다고도 하구요. 그런데 그건 왜?"

"그의 또 다른 영화 '리플리컨트'도 기억나시죠? 스페이스 스트레인저의 여주인공 리플리와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컨트, 이걸 합쳐서 '리플리컨트'라는 영화 제목을 붙였을 거에요."

"리플리컨트가 먼저고, 스페이스 스트레인저가 나중에 만들어진 작품 아닌가요?"

"그러니까 리플리컨트라는 말장난을 먼저 만들어낸 다음 그 말장난에 맞춰 스페이스 스트레인저의 여주인공 이름을 리플리로 붙인 것이겠죠. 스페이스 스트레인저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온갖 성적인 코드를 가득 담은 영화였고 말이죠. "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거랑 로마행 비행기 일등석이랑 무슨 관련이 있나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그 사람이 들어올 테니까."

 

잠시 후 튀어나온 뱃살과 반백의 머리, 주름진 얼굴의 노인이 자리에 앉았다. 습관적으로 시거를 꺼내 물었다가 승무원들에게 제지를 받자 한바탕 말다툼을 하고 온 것인지 이마엔 성난 주름이 잡혀져 있다.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아내더니 고집스레 다시 또 시거를 꺼내문다. 자유를 만끽하기라도 하듯 엄지와 검지로 시거를 피우는 시늉을 하더니 숫제 담배 연기를 뿜는 흉내까지 내는 것이다. 귀한 일등석 손님인데다가 실제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 것도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도 아니니 승무원으로서는 제지할 도리가 없다. 제지하면 할수록 더 짓궂어질 테니 말이다. 저 사람은 그 유명한, 아니 악명 높은 에로 영화 감독 '퀸토 그라스'이니  비행사 입장에선 똥을 구태여 밟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미모의 젊은 여승무원을 나이 지긋한 남자 승무원이 데려간다. 젊은 날 퀸토 그라스의 영화 꽤나 봤을 법한 남자 승무원은 행여나 퀸토 그라스가 여승무원을 희롱이라도 할까봐 내심 걱정이 되는 것이다.

퀸토 그라스의 무례한 행동을 보던 미사키 여사가 혀를 찬다. 그러자 긴이 미사키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어렵게 찾은, 자유시간이거든요."

 

80년대까지 열정적으로 사극과 시대극, 현대물을 오가며 이런저런 에로 영화, 어쩌면 포르노에 가까운 영화들을 찍어내던 퀸토 그라스는 90년대 들어 종적을 감췄다. 아니 종적을 감춘 것은 아니었다. 퀸토 그라스의 이름을 딴 영화는 계속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라스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 아니라 후배 감독들이 촬영한 영화에 퀸토 그라스의 유명세를 입혀 해외에 팔아먹는 영화들이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영화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 수는 현저히 적었으며 그마저도 지난 날의 열정과는 거리가 먼, 80년대의 히트작의 리메이크작과도 같은 자기 복제 수준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기술의 발달로 화면은 더욱 또렷해졌고 세트는 좀 더 고급스러워졌고 노출 강도는 더욱 높아졌지만 그것은 80년대 그가 남긴 영화, 나름 에로 영화의 걸작으로 불리는 'AnnaMona'의 복제품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90년대부터는 작품 활동이 워낙 뜸한 탓에 과로로 죽었느니 복상사로 죽었느니 심장병으로 쓰러졌느니 AIDS에 걸려 은둔했다는 등 온갖 괴이한 소문에 휩싸이기도 했던 그 문제의 인물이 지금 로마행 일등석에 타고 있는 것이다.

 

긴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퀸토 그라스의 좌석 근처로 다가간다.

시거를 씹어물듯 허세를 부리고 있는 노감독의 면전에 대고 긴이 짧게 얘기를 하자 그라스가 급히 시거를 입에서 뗀다. 얼굴은 굳어지고 식은 땀까지 흘리는 듯 했다. 좌석으로 돌아온 긴에게 미사키가 묻는다.

 

"뭐라고 했길래 저 사람이 저래요?"

"두 단어만 말했죠. 짧게."

"경찰이라고 했어요? CIA? FBI? "

"아뇨, 이렇게만 말했답니다. '헬로, 리플리컨트'."

"헬로, 리플리컨트?"

"저 사람은, 영화적으로는 천재였지요. 어느 장르에서나 말이에요."

"윌리엄, 윌리엄 올리비에? 설마?" 

"윌리엄이 죽은 것으로 '처리'되면 행복해질 사람이 많았지요. 본인은 하고 싶은 영화를 다시 만들 수 있어서 행복할 테고, 영화사 사장부터 배우들까지 더 이상 광기어린 그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될테니 행복할 것이구요. 영화 제작에 실패하고 빚에 쫒기던 조나단 올리비에는, 형이 남긴 영화들의 판권을 소유할 수 있으니 행복한 일이겠지요. 그가 만든 80년대 걸작 '블레이드 커터'는 감독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미완의 프로젝트, 영원한 걸작으로 남을 것이니 '블레이드 커터' 역시도 행복했을 테구요. 아마 그 자리는 윌리엄이 초대한 자리일 거에요. 특수분장에 뛰어난 윌리엄이니만큼 자신을 닮은 시체 하나 정도는 준비할 수 있었을 테구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야 윌리엄이 죽어야 행복할 사람들이니 다들 윌리엄이 죽었다고 믿을 것이죠. 믿는 만큼 보는 것이고 보는 만큼 행하는 게 세상 이치니까요. 이제 곧 코닥 극장에는 거장 윌리엄 올리비에 감독을 추모하며, 블레이드 커터 본편에 최근까지 촬영한 인터뷰를 추가한 특별 영상이 상영될 겁니다. 그럴 생각에 배우들 인터뷰부터 먼저 찍어둔 것이겠죠. 블레이드 커터 리메이크작에 동양인 노예 역할로 캐스팅되었으니만큼 이병헌도 그때 다시 코닥 극장을 찾을 거에요. 이번 'RED2' 시사회는 놓쳤지만 그때 다시 코닥 극장을 찾게 된다면 우리도 곧 행복해질 겁니다."

"둘이 같은 사람이라고 언제부터 눈치챘어요?"

"퀸토 그라스 감독이 여주인공 이름인 'Anna'와 이탈리아어로 ‘여자의 성기’를 지칭하는 ‘mona’를 결합시켜 AnnaMona 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 윌리엄 감독의 '리플리컨트'를 바로 떠올렸지요. 스페이스 스트레인저에 삽입된 성적인 코드들도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면 생각해내기 어려운, 범상치 않은 것들이었구요. 얼굴은 다르게 바꾸기 쉬워도 독특한 취향이야 바꾸기 힘든 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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