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것을 믿는다.

-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 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는 읽을수록 비단 사랑을 떠나서, 살면서 무언가를 열망할때의 기다림과 그 자세에 대한 낭만적인 위로같아져 더 즐겨읽게 됩니다. 문태준의 가재미를 읽다보면 파랑같은 날들에서 헤진 감정이 국수를 삶던 저녁에서 완전히 무장해제 됩니다. 아, 국수를 삶던 저녁이라니 - 그리고 다다른 그녀의 침대에서, 결국 생물학적 죽음을 조우해야하는 인간 본연의 숙명앞에 무력해지는 우리를 마주하게 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03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60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457
73141 프로필 사진을 보고 성별을 착각하는 예술계 사람들은 [6] 가끔영화 2012.07.12 3867
73140 채식주의자의 슬픔 [8] koggiri 2012.07.12 3408
73139 유령 불판 [4] 라인하르트백작 2012.07.12 1491
73138 [자작] 조금 어려운 틀린그림찾기 [24] DaishiRomance 2012.07.12 2860
73137 영삼이 근혜는 칠푼이라고 [1] 가끔영화 2012.07.12 1655
73136 영화 추천 부탁드릴게요...! [7] 미니화분 2012.07.12 1744
73135 [윈앰방송] 2시까지 클래식 나갑니다 [5] ZORN 2012.07.12 868
73134 방콕에서의 10일째 하루, 오랜만입니다. [34] shyness 2012.07.12 3723
73133 [등업인사겸]시대극? 추천받고 싶어요. [16] 꿈쟁이 2012.07.13 1922
73132 [바낭2] 내꼬마 2012.07.13 945
73131 비행중 기압차로 인한 귀통증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께 작은 정보. [26] aires 2012.07.13 9669
73130 인셉션 나온지도 벌써 2년이 됬네요 [7] 유은실 2012.07.13 3583
73129 급궁금증)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5] 라인하르트백작 2012.07.13 2578
73128 노장의 패기!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의 단편 연출작 <Jury>현장에 다녀왔습니다! [2] 코기토 2012.07.13 1863
73127 나말고 딴놈들은 믿지마! [3] 빠삐용 2012.07.13 2241
73126 [듀나인] 형광등 위치를 바꾸고 싶은데, 어렵나요? [2] 블랙북스 2012.07.13 1683
» 가장 기쁜 사랑시는 즐거운 편지, 가장 슬픈 사랑시는 가재미 [3] buendia 2012.07.13 2345
73124 윈도우에 십수년간 길들여졌는데 맥 OS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8] Jade 2012.07.13 3484
73123 여행지에서의 고독병 [8] 마른김 2012.07.13 2573
73122 어려지는 것. [1] Doda 2012.07.13 138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