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좀 미쳤던 것 같아요.

저는 다크나이트를 극장에서만 11번 봤습니다, 아이맥스 4번.

처음 한 다섯 번까지는 이 정도는 봐줘야지 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후로는 그냥 지나가다 극장만 있으면 뭐에 홀린 듯 들어가서 다크나이트를 예매하는 스스로를 발견.

거의 서울시내 극장 순례를 했던 것 같아요. 

용산, 왕십리, 대학로 cgv에 강동, 홍대 롯네시네마와 강남 씨너스, 코엑스 메가박스, 그 외에도 몇 군데 더 있을 겁니다.

한 아홉 번째 쯤인가, 지갑에 쌓여있는 다크나이트 극장표를 보곤 퍼뜩 정신이 들어 작작 하자고 생각했는데

아마 마지막은 1년 후 아카데미 수상 기념으로 재개봉한 왕십리 아이맥스 상영이었을 거예요.

아무튼 극장에서 본 것만 세면 그렇습니다.


요 며칠 라이즈 개봉을 앞두고 비긴즈, 다크나이트의 복습에 들어갔습니다. 

서플까지 한 씬 한 씬 다 챙겨보면서 말이죠.

비긴즈는 애초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다크나이트의 프리퀄로 생각하고 다시 보니 또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오랫만에 다시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를 보자니,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사소한 것들이 눈에 띕니다.

다들 느끼셨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1.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놀란 시리즈의 악당은 편당 크게 셋을 꼽을 수 있습니다.

비긴즈의 라스 알굴과 다크나이트의 하비 덴트는 '좋은놈'에 해당합니다.

악의 편에 선 악당이 아니라, 배트맨과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달라 적대하게 되는 인물이죠

비긴즈의 팔코네와 다크나이트의 마로니는 '나쁜놈'이죠

고담시의 부정과 부패와 타락의 핵심, 악의 축을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

비긴즈의 스케어크로와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이상한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이렇게 도식화해놓고 보면 놀란의 시리즈에서 배트맨이 왜 그렇게 바빴나 알 것도 같습니다

좋은놈들을 상대로 정의란 무엇인가 고민해야 되죠, 나쁜놈들을 상대로 싸워야죠, 이상한놈들과 프릭쇼를 펼쳐야죠.


2. 레이첼의 무서움

다시 보면서 좀 웃었던 부분인데, 레이첼은 한 마디로 '정의 덕후'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부모를 죽인 놈이 사면된다는데 좀 복수심에 불타면 좀 어때. 

잘 타이를 수도 있는 걸 '나의 정의찡을 모욕하지 말라는' 모드로 욱하는데 빵 터졌습니다.

뭐, 그 덕에 따귀 한 대(두 대죠)로 수퍼히어로를 창조해낸 여인이 되긴 했지만요.

비긴즈 마지막 대사도 다시 보니 다르게 들리더군요.

브루스가 배트맨은 상징적인 가면일 뿐이고 우린 우리 미래를 생각하자고 하니까 정색하면서

뭔 소리냐고, 배트맨이 왜 가짜냐? 가짜면 니가 가짜다! 뿡! 하는데 와... 케이티 홈즈의 단조로운 연기가 아니었다면 정말 소름돋게 잔인한 말이 아닌가요.

평생을 같이 한 친구에게 넌 가짜야 라고 면전에 던지는 패기, 정의의 편에 서기로 했으면 적당히 인생 즐길 생각하지 말고 니 인생 따위 깨끗히 포기하라는 말을 엄청 다정하게 해! 

그러고 떠나선, 배트맨 이후 가장 정의롭다는 하비 덴트의 애인으로 귀환, 둘 사이에서 누가 더 정의롭나 저울질을 하다가, 배트맨 정체 밝히기 기자 회견에서 브루스보다 하비가 더 정의로운 선택을 하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하비 선택. 

지금 저 말 그대로 'ㅋㅋㅋ'거리면서 쓰고 있습니다.

포인트를 이렇게 두고 보면, 기자 회견씬은 거의 미인을 두고 두 사내가 벌이는 아다치 미쯔루식 레이스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사내들이 겨루는 게 야구나 수영이 아닌 정의였다는 점만 빼면 말이죠.


3. 거짓

다크나이트가 암울하다, 암울하다 하지만 정말 암울한 건 애써 지켜낸 정의가 모두 거짓과 허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 같습니다.

하비 덴트는 배트맨이 레이첼 대신 사회 정의, 즉 자신을 택했다고 믿지만 거짓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더 추악하기에 (브루스와 레이첼의 외도) 브루스는 그 거짓이 하비를 지탱하게 둡니다.

브루스는 레이첼이 마지막엔 하비가 아닌 자신을 사랑했다고 믿지만 거짓이죠. 하지만 진실은 실망스럽기에 배트맨까지 타락하는 걸 막기 위해 알프레드는 그 거짓이 브루스를 지탱하게 두죠.

조커는 인간이 얼마나 사악하고 실망스런 존재인지 확인시켜주기 위해 선박 폭파 게임을 벌이지만, 선박은 폭파되지 않고 배트맨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두 선박의 인간들 모두 정의로운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악한 선택을 할 용기가 없었거나(민간인 선박),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죄수 선박)했을 뿐이죠. 배트맨은 보란듯이 조커에게 인간은 니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 인간은 배트맨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도 아니었던 거죠. 여기서도 배트맨의 믿음은 허구를 바탕으로 합니다.

결국 고담시를 수호하던 백기사는 타락하지만, 흑기사가 스스로 악당의 오명을 뒤집어 쓰고 떠나며 고담시의 평화는 지켜집니다. 역시 허구, 허구입니다.

진실은 정의롭고 거짓은 불의하다는 단순한 도식을 온 몸으로 깨부수며 영화는 끝나죠.

불의의 심플함에 비해 정의는 너무 복잡하고, 리얼 월드에서 정의 구현이라는 게 얼마나 답 없는 일인가를 영화는 재현해보입니다. 

조커의 인질극을 보세요. 조커를 잡아야 하고, 인질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질과 악당은 서로 뒤바껴있죠. 조커의 거짓 인질극에 속은 경찰은 악당이 아닌 인질을 공격합니다. 배트맨은 서로 총구를 겨눈 인질과 경찰이 서로 해치지 못하게 하면서 양쪽 모두를 구해야 하고, 조커도 잡되 살인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고, 그러는 동안 선박에 납치된 사람들도 지켜야 하며, 시민들을 혼란에서 구하기도 해야 하죠. 

예전에도 이야기한 적 있지만 이 영화에서 고뇌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리적인 것이지요. 아이맥스니 어쩌니 하는 호들갑의 당위성은 거기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시각적으로, 즉물적으로 그 고뇌의 한복판에 던져지는 경험 말입니다.


진실이 그 자체로 충분히 좋은 것이 아닐 때, 허구로 대중을 통치하는 것이 옳은지, 그렇다면 그 판단은 과연 누가 하는지, 그 위험한 질문과 선택에 대한 대답이 이번 편에 있을지, 그것을 물리적으로 어떻게 구현해내었을지도 궁금합니다. 


4. 돈질 히어로

배트맨은 아이언맨과 더불어 수퍼파워 없이 돈질로 파워를 얻은 히어로 양대산맥이죠.

둘 다 취미 생활로 영웅놀이하는 갑부라는 오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저는 아이언맨 안티 배트맨 팬입니다.

둘을 가르는 가장 큰 포인트는 자기 견제가 아닐까 해요.

아, 물론 아이언맨도 속으로 열심히 자기 견제 하겠죠. 그런 게 아니라, 놀란의 배트맨은 말 그대로 'team batman'이라는 점이랄까요.

만화 원작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놀란의 배트맨은 적당한 허세로 영웅인 자신의 처지를 고뇌하고 그래도 난 정의로우니까 ㅇㅇ. 하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고뇌를 물리적으로 하듯, 견제도 물리적으로 하죠. 웨인사는 폭스에게, 웨인가의 재산은 알프레드에게, 범죄자의 단죄는 철저히 고든에게 맡기고, 자신이 틀린 선택을 할 땐 언제든 레이첼에게 얻어터질 준비가 돼있고요. 스스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는 겁니다. 그 철저한 자기 불신이 놀란 시리즈의 서브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인상마저 듭니다.


5. 차를 쫓는 개

'내가 누군지 알려줄까? 난 자동차의 뒤를 쫓는 개야. 자동차로 뭘 어쩌자는 게 아니라 그냥 막 쫓아가는 거야. 이유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라고'


이 대사가 조커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촌철살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복습하다보니 다른 포인트가 생기더군요.

알프레드에게 브루스가 말하길, 배트맨은 고담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단 하나 할 수 없는 건 악당이 되는 것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겪은 뒤 마침내 진실을 덮고 스스로 악당의 오명을 쓰는 것만이 고담시에 필요한 정의로운 선택임을 받아들이죠. 조커가 이기게 할 순 없다, 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역설. 배트맨은 악당이 되어 도망길에 오르고 이제 온 세상이 배트맨을 뒤쫓습니다. 영문을 모른 채, 자동차를 따라 뛰는 개처럼 말이죠. 조커를 이기는 순간, 온 세상이 조커가 되어 그를 쫓는- 그야말로 배트맨의 악몽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다크나이트의 마지막 대사는 영화관 번역처럼 '우리의 영웅, 다크나이트'가 아니라 '영웅이 아닌 다크나이트'라는 선언입니다. 허구 위에 쌓아올린 평화, 고담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스스로들에 대한 자조적인 환멸을 담아 말이죠.


'배트맨이 왜 도망가요, 아빠?'

'우리더러 잡으라고'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왜냐면 그는 고담시엔 과분한 영웅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기 때문이야. 그가 기꺼이 도망쳐주기에, 우린 그를 뒤쫓는 거야. 그는 우리의 영웅이 아니라 침묵의 수호자, 어둠 속에서 우릴 지켜보며 보호하는 다크나이트이기 때문이지.'




쓰다보니 브레이크가 안 걸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복습하면서 챙기신 다른 포인트가 있습니까?

하루 남았습니다, 두근두근하네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1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2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933
72887 "강남" 스타일이, 일본으로 가면 "롯본기" 스타일로 바뀌는군요 [2] espiritu 2012.07.18 3769
72886 [듀나인] LG 3D 스마트 TV랑 LG 홈시어터 쓰시는 분 안계신가요? [9] 가라 2012.07.18 2374
72885 출근 시간이 기다려질만한.. [17] 두근두근 2012.07.18 3779
72884 개판 사랑과 전쟁 [7] 화려한해리포터™ 2012.07.18 6072
72883 유세윤의 아트비디오 - 일렉트릭 쇼크 [1] mana 2012.07.18 2591
72882 이런 팥빙수 아시나요 [8] 가끔영화 2012.07.18 3460
72881 배트맨 비긴즈 복습중에 의문점. [6] 거울에비친 2012.07.18 2500
72880 추적자 박검사 어디서 봤다했더니, [8] 라디오스타☆ 2012.07.18 3261
72879 아비의 명예회복 가끔영화 2012.07.18 1088
72878 북한에서 잠시 후 12시에 중대 발표 한다는데 (김정은 "원수" 칭호) [31] espiritu 2012.07.18 4703
72877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불꽃놀이 보셨나요? [8] 오늘은 익명 2012.07.18 2236
» 놀란 배트맨 시리즈 복습 끝내셨습니까 [8] lonegunman 2012.07.18 3014
72875 미드/영드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 [16] 쏘맥 2012.07.18 4149
72874 후보님 여기는 대한민국입니다. [3] 도야지 2012.07.18 2889
72873 만추 김태용 감독, 웹툰 신과 함께 영화 메가폰 [9] 지지 2012.07.18 4319
72872 [듀나in] 아부다비에 하루 있게 되었는데요; 여행 관련 정보 좀(굽실) [4] tveye 2012.07.18 1169
72871 자기 색깔 유지하면서 히어로무비 흥행시킨 감독들 [9] 화려한해리포터™ 2012.07.18 2290
72870 [듀나in] 런던에서 볼 뮤지컬 추천해주세요 [26] the end 2012.07.18 2485
72869 T스토어 오후 3시 유료앱 무료 다운로드 이벤트 [5] Tutmirleid 2012.07.18 1702
72868 좋게 보다와 좋아 보이다의 의미는 많이 다른 걸까요? [11] 우박 2012.07.18 168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