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심심함

2012.07.25 08:18

LH 조회 수:2598

"공부해라." 우리나라 학생 치고 이 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공부하고, 공부해서 잘 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가게 되면 좋은 직장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 돈을 많이 벌게 되고- 기타등등의 기나긴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공부에서 이기고, 경쟁에서 이겨서 최종적으론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부모들은 아이를 쳇바퀴에 밀어넣고 채찍질을 해댄다. 그런 아이들이 자신이 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생각해볼 겨를이 있을 리 없다.

학교, 공부, 학원. 빡빡하게 짜여진 스케줄 속에서 숨쉴 구석은 없다. 이제 갓 6개월 된 아이에게 원어민 선생님을 붙여 영어를 가리키고, 4살짜리 아이의 교육비가 300만원이 든다고 한숨을 쉬며, 우리 애만 놀게 놔두니 불안하다고 부르짖는 어머니들의 목소리를 허다하게 들었다. 식사를 제대로 할 틈도 없고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쓰러져 자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학교 가기 바쁘다. 어느새 강남에는 아이들 전용 정신과가 부쩍 늘었다던가.

 

하지만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기 이전에, 그렇게 만든 어른들 부터도 자신이 무얼 하는지 잊어버린 듯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밤이면 밤마다 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사람들은 월화수목금토일, 쉬지 않고 일한다. 낮이면 낮, 밤이면 밤. 일하고 공부하고 또 일하고, 또 스펙 쌓아대고. 열심히 사는 것은 좋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 걸까. 틀림없이 행복해지려고 그러는 거지 불행해지려고 그런 것은 아닐텐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어른들의 생활이란 일로 점철되어 있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하고, 휴일도 일하고, 가족들과 대화는 커녕 코빼기 한 번 마주할 틈도 없이 일하고, 그렇게 아둥바둥 번 돈은 자식의 교육비로 몽땅 쏟아붓는다. 그렇다면 제 때 쉬기는 커녕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무엇일까.

 

자신의 자식이 태어나는 데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일만 했다고 자랑스러워 했던 어떤 과장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낀 것은 애달픔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그리고 기쁜 시간을 함께 나눠야 그것이 비로소 가족일진대, 그 많은 것을 희생하고 얻은 게 '고작' 과장 자리라니 참으로 작고 슬퍼보였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니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대화를 나눌 시간은 더더욱이나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건 '아빠'가 아니라 그냥 돈만 대줄 뿐인 물주이니까.

 

오래전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부유한 아버지를 둔 동기 녀석이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들었다. 가족은 돌아보지도 않고 일만 한다고.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엄청난 열과 성을 쏟은 덕분에 좋은 스펙을 가진 아는 사람은 부모님에게의 미움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다.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봇물처럼 쏟아낼 정도였으니, 얼마나 그 미움의 정도가 크고 깊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들의 부모들은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알아봤자 뭐라 할 수 있을까. 내가 너희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사실이겠고. 하지만 그 희생이란 게 자식들에게 얼마나 와닿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많은 희생을 했는데도 아무도 행복해지진 않는다. 이거 참 이상한 일 아닌가. 열심히 하면 그만큼 댓가가 돌아와야 할텐데. 미움과 증오, 불신만 남고 이것은 대물림 되어 불행한 아이는 불행한 부모가 되어 그들의 아이들을 똑같이 키워낸다. 그렇게 해서 (운좋게) 원하던 모든 것을 얻게 되었을 때 만들어지는 것은 호두만한 뇌를 가진 무게 50톤의 브론토사우르스다. 생각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질 줄도 모르고. 뭐, 바빠서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라면 그것도 행운이겠지만.

 

아무래도, 사람은 심심해질 필요가 있다.

그냥 휴식이 아니다. 일에 지친 사람은 휴일에는 바다표범이 되는 법이니까. 여기서 말하는 심심함이란, 일을 마치고 쉬고 나서- 잠은 오지 않되 할 일이 없는 순간의 무료함이다. 그러면 비로소 생각을 하게 된다.

 

"무얼 하지?" 라고.

 

그러면 조직의 톱니바퀴가 아닌 '나'를 위한 일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런 심심함을 '불안'해 하기에 그럴 틈 없이 몰아붙이고 공부하고 스펙을 쌓고 쳇바퀴를 달리지만, 이런 쓸데 없는 심심함을 누리며 책을 읽어도 좋고, 게임을 해도 좋고, 쇼핑을 하거나 여행을 해도 좋다. 뭐 꼭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걸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래야 한다. 일-식사-수면이라는 지극히 필수적인 요소에 대단히 쓸데없는 것을 한 두개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삶은 지극히 풍요로워진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인간의 역사는 발전해갔다.

이렇게 말하면 "남들은 다 뛰는 데 나만 멈춰 있으란 말이냐."라는 볼멘 소리가 돌아올 것이겠지만. 어차피 뛰어봤자 별 거 없다. 굳이 지금 뿐만이 아니라 머나먼 역사 시대에서부터 4살짜리 아이에게 한문 원전을 읽게 하는 조기 교육도 있었고 입시 부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성공이란 걸 한 사람은 정말 한 줌에 불과했고 그런 사람들의 가정은 초토화 되거나 본인은 약물 중독 , 사회 부적응 등등으로 피폐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찬찬히 고민해볼 가치는 있다.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 무엇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이제 나는 무작정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하던 어린 애도 아니고, 어차피 한 번 살다가는 인생인데 내가 원하는 것 한 번 쯤은 해봐야 하지 않나.

 

오늘도 나는 심심함을 이겨내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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