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어머니께서 ABE전집을 사 주셨습니다. 그때가 80년대였는데. 그때 같이 사주신 위인전 100권과 ABE 전집 88권을 한달만에 끝장나는 것을 보시곤 "知泉아, 책은 사서 보는 게 아니라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거야"라고 선언하시며 딸내미에게 도서관을 소개시켜주셨습니다. 방학이라 매일매일 출근도장을 찍었습니다. 사실 버스타고 도서관 가는 것도 참 재미있었어요.


ABE 전집에서 제일 좋아했던 책은 검은 진주,  외딴 섬 검은 집 소녀, 부억의 마리아님, 과 아버지가 60명 있는 집, 큰 숲 작은 집, 지노의 전쟁, 내 친구 비차, 꼬마 바이킹시리즈였습니다. 미트라신을 믿는 소년과 로마 점령군이 나오는 책도 있었는데 제목을 모르겠습니다.


거기다 제겐 78년도인가 발간된 빨강머리 앤 전집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그린 게이블즈의 앤이 아닌 전권 번역된 앤 전집은 최근에 ANNE 세트가 나오기 전까지는 쟤가 유일했을 거예요. 얇은 펜선으로 그려진 일러스트에 루시모드 몽고메리가 쓴 단편선들이 포함된 전집이었습니다. 애번리 마을 사람들의 연애, 비밀, 증오, 용서가 점철되어 있어서 본편보다 단편집들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거기다...혹시 ABE전집 만든 곳에서 SF 전집도 만들었나요? ABE전집과 똑같은 판형과 디자인과 종이로 된 SF전집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대학생이 되어서도 물고빨고 틈틈히 보면서 좋아했습니다. 당연히.


어느날 어머니께선 막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사촌동생네로 저 전집들을 다 보내버렸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내 책장이 바뀌어 있는걸 보고 놀라서 어머니께 달려갔더니 "그거 OO이 읽으라고 보냈다"는 말에 식음을 전폐하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남자친구랑 헤어졌어도, 짝사랑 하던 애가 내 친구랑 사귈 때도, 전과목을 F로 깔았을 때도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을 거예요.


삼일 밤낮을 울어도 내 책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엄마 미워. 


책이 사라진지 한 십년쯤 되었을 때 노란 책냄새가 가득한 오래된 책을 보관해두는 장서실에서 발견했을 때. 늦게 시작한 공부따위. 동기에게 사정사정해서 열한권을 한꺼번에 빌려놓고 다시 읽는 그 기분이란. ...배고팠습니다. 뭔 먹는 내용이 이렇게 많아! 그래도 행복했어요.


반납하면서 찾아봤더니 같은 연도에 나온 초원의 집 전집이 있었습니다. 그 전집도 참 배가 고팠어요.


지금 제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딱 하나예요. 어제밤 갑자기 빨강머리앤 전집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새로나온 개정판 세트를 예.com에서 58,800원으로 세일을 하고 있습니다. 결제 창만 누르면 되는데 전 옛날에 제가 읽었던 그 하드커버에 하얗고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제목이 음각이 되어있고 일본 중역느낌이 물씬나는 옛날 번역에 눈을 때록거리는 앤이 펜선으로 그려진 그 전집이 가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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