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기가 이제 생후 6개월이 지났네요.

지금 아기를 재우고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어요. 마시면서 듀게에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조금 깁니다.

(모유 수유 중이라 커피를 마시면 안 좋을텐데.. 그렇다고 소맥을 들이부을 순 없는 노릇이니.; 

 박카스가 있었다면 박카스 세 병을 원샷했을 듯) 

 

제 직업은 영어 강사였습니다. 

 

처음엔 평강사로 시작했는데, 어찌저찌 디렉터 (=팀장이나 ,흔히 말하는 교수부장급)으로 포지션 변경이 되었구요.

원체 자존감이 부족하고 내성적인 인간인 데다가, 결혼 후 연고가 없는 대전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기 때문에 

친구도 가족도 없는 낯선 타지에서, 전 제 존재의 의미를 일터에서 찾았었죠.

주말에는 심심해서 집 구석을 굴러다니며 몸부림치다가, 월요일 급빵긋하여 부지런히 출근했던 것 같습니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별 것 아닌 영어강사임에도 자부심은 대단했던 것 같아요. 

서툴지만 진심으로 목숨걸고 일했고, 감사하게도 전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제 노력에 대한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3년 정도 근무하고, 출산을 위해 직장 생활을 접고 친정 부모님이 계신 부천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출산 이후 반 년 남짓.. 집에만 있다보니 당연히 산후우울증이 찾아오더군요. 다시 일하고 싶은 욕구.

 

샤워하다가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면, 반 벌거숭이가 되어

아마존의 미치광이 여전사처럼 가슴을 반쯤 드러내고 복도를 질주하는 그런 생활에서 탈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그저 그런 허름한 애엄마, 머리가 떡이 진 아줌마가 아니고 싶은 욕구.

철없는 바램..

 

이번 주말이 지나면, 전 어쩌면 제게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를 채용 제의를 거절해야 합니다.

며칠 전 너무 속상해서 블로그에 올린 내용.. 그대로 옮겨볼게요.

블로그 특성상 존댓말이 아님을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

 

 

 

 

 

...

1.
출산 후 몇 번인가, 채용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우연히도 아기의 분유거부 시기와 맞물려, 근무는 커녕 면접조차 보러가지 못했다.
우선, 단 하루라도 아기를 믿고 맡길만한 곳이 없었고, 아예 어린이집 영아반으로 보내자니 아직은 너무 어린 데다가
보내게 되면 십중팔구 아기가 감기를 달고 산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사비를 들여 육아 도우미를 고용하자니 세상이 하 수상하여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어린이집 영아 사망 사건.. 도대체 몇 번이나?)
그렇게 어물어물 몇 번의 기회를 흘려보내며, '그래. 내 처지에 일은 무슨..' 포기했다.


2.
자포자기 한 뒤로,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 가죽을 열심히 둘러쓰기 시작했다. 높이 매달린 탐스런 포도송이를 간절히 바라보며
폴짝 폴짝 뛰어보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그렇다고 현실의 좌절을 인정하기엔 왠지 분이 풀리지 않는다.
자기 암시가 시작된다. - 어차피 저것들은 먹지 못할거야. 누구나 다 아는 여우와 신포도 얘기.

여우의 가죽을 둘러쓴 나는, 틈만 나면 가족이며 지인들에게 중얼거렸다.

- 내가 상담한 학부모 학생들을 보니까, 가만 생각해 보니 직장맘들 아이들보다 전업주부 아이들이 대체적으로 훨씬 더 공손하고
예의바르며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었던 것 같아. 공부도 잘 하고 말이지. 맞아. 아기한테는 엄마가 있어야 해. 몇 푼 벌자고 평생
후회할 짓을 해선 안되겠지? 떠벌떠벌떠벌. 눈물 겨운 자기암시.


3.
허름한 몸빼바지에, 산후 탈모로 휑해진 정수리며 넓어진 이마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끔 스스로를 단련해 가던 어느날,
또다른 제안을 받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내 처지에선 정말이지 입이 딱 벌어지고, 과분하고, 너무나 욕심이 나서
가능하다면 꽉 그러잡은 뒤 절대로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런 포지션이었다. 면접도 아니고 채용 제의.

아기 때문에 도무지 찾아뵐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어렵게 고사하였으나, 내 상황을 이해한다며 한 번 더 붙잡으셨다.
그래서 오늘, J가 하루 회사에 휴가까지 내어가며 담당자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근무지는 무려 강남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어학원 강남 본원의 원장급, 혹은 부원장에 준하는 교수부장 자리. 탐나지 않을 리가.



4.
인터뷰 일자가 정해진 뒤, 며칠 동안 마음은 희망과 자포자기의 양 극단을 부지런히 오갔다. 몇 달간 묵혀둔 각종 교재들을
몽땅 꺼내어 소파에 늘어놓고 수유하는 틈틈이 들여다 보는가 하면, 이유없이 희망에 차거나 미리 앞서 절망하기도 했다.

어제는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미용실을 찾았다. 미용사가 단 한 명 뿐인, 허름한 동네 미용실 의 낡은 의자에 앉아 길어진 머리를
단발로 다듬었다. 이마를 가리기 위해 앞머리를 길게 내리면서, 나이 많은 미용사는 내 산후탈모가 무척 심각한 수준이며,
넓어진 이마가 마치 황비홍을 연상시킨다며 비죽비죽 웃었다. 비죽비죽 웃는 그 입을 그대로 좌악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일 면접이 얼마나 중요한데, 봉두난발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시내 유명 헤어샵으로 가기엔 시간이 촉박하고.
무엇보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서진이가 눈에 밟힌다. 어쩔 수 없다. 참아야지.. 아기 낳은 죄로 내가 참아야지.




5.
(인터뷰 당일. 출발 전)

이스라엘 출장 후 제대로 쉬지 못한 J(신랑)가, 하필 그 날 새벽부터 38도를 웃도는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하필'이란 당시 극도로 이기적이었던 내 마음에 가장 첫번째로 떠오른 단어였다. 하필 지금 아프다니. 인터뷰 또 취소되면 안될텐데..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J 이마에 찬 물수건을 얹고, 약을 먹이고.. 함께 밤을 샜다.
초조함과 죄책감이 뒤범벅되어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음.

그리고 아침. 열이 내린 J를 재촉해 출발 준비를 했다. 머리를 감고,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화장을 했다.
반 년 넘도록 먼지만 쌓인 파우더 팩트며 마스카라, 아이라이너 모두 용케 굳지 않았구나!!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진중한 태도로 화장을 했다. 예전에 즐겨 입던 하얀색 스키니 진에, 예전에 드라이 맡긴 뒤
고이 모셔둔 비싼 니트 티셔츠를 다시 꺼내 입었다. 다 빠져 휑한 정수리,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머리카락들에 볼륨을 주었다.

출발 준비를 마친 뒤 거울을 보면서, 실상의 내 모습은 생각만큼 그리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잠깐..
어쩌면 모처럼 꺼내어 신은 10cm 하이힐의 마법 덕분인지도.

서진이는, 아침부터 쭈쭈없이 분유병부터 물리는 엄마의 초조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별다른 투정 없이 다 먹어주었다.

차 안에서도 순하게 앉아 있다가, 어느샌가 카시트 안에서 조용히 잠이 든다. 고마워라. 네가 엄마를 도와주는구나.
잠든 아기 옆에서, 눈을 감았다. 인터뷰에서 오갈 법한 대화들을 떠올린다. 내 쪽에서 확인해야 할 내용들, 또는 내가 받을법한
질문들. 머릿속에 떠올리며 답을 생각해 두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 뒤, 강남 모 빌딩 앞에 도착.




6.
인터뷰는 약 한 시간 반 넘게 진행되었다. 인터뷰 담당자는 사업본부장.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설명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급적 상냥하면서도 프로페셔널한 포즈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 로
꼿꼿이 앉아, 이따금 그의 말에 적절하게 맞장구를 치며 간혹 날아오는 질문에 신중히 답을 한다. 질문과 답변이 여러 번 오갔다.
비젼이 좋다. 몇 년간 몸담을 직장으로써 네임 밸류도 나무랄 데 없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이 생긴다.
게다가 담당자는 내가 꼭 일을 해 주었으면 한다. 아기 엄마라는 상황을 고려한 파격적인 제안도 여럿 해 주었다.

문제는, 시기급여이다.
사실, 급여만 괜찮은 수준이라면 다소 무리를 감수해서라도 강남 쪽으로 이사를 가려 했다. J는 해당 지역의 아파트 시세와
본원 근처의 어린이집도 여러 군데 알아두었다.
'대전보다야 강남, 그것도 본원이니 연봉이 훨씬 세지 않겠어.?'
J의 낙관적인 예측은 그러나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예전과 동일한 수준의 연봉. 출퇴근 시간이야 내 상황을 고려해 최대한
맞춰 준다고는 해도, 아기를 돌보기 위해 추가적으로 발생할 모든 비용을 감수하기엔 넉넉치 않다. 마음이 어두워졌다.

긴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서로 일터에서 단련된 예의바른 인사를 매끄럽게 주고 받았다.

- 제가 제안해 드린 조건들을 검토하셔서 8월 초까지 연락을 주십시오. 긍정적인 답변을 저희 쪽에서는 기대하겠습니다.
엘레베이터로 향하다가, 때마침 방문한 부사장이란 분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또다시 인사. 등 뒤로 엘레베이터 문이 닫혔다.


7.
돌아오는 길.

J는 이야기를 듣더니 단칼에 잘라 말한다.
- 득보다 실이 많네. 이건 안되겠다.
다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실이라니?'
J의 답변 - 알잖아. 이사에, 어린이집이나 도우미 비용에. 게다가 일년이나 일찍 전세를 움직여야 하는데, 시기도 촉박하고.
시무룩하여 말했다. '그럼 전세 뺄 때까지만 부천에서 통근하면.. 자동차로...'
J의 답변 - 안 돼, 위험해. 대전 시내 그 짧은 거리에서도 접촉사고 몇 번이나 났잖아.
             그리고 출퇴근 시간만도 총 두 시간이
 훌쩍 넘는데, 서진이는 어떡하냐? 할 수 있겠어?




---------------------------------------------------------------------------------------------------------------------------------

+ 독백.

응. 알아. 알면서도 자꾸 다시 물어보게 되네. 아쉬워서.. 화도 나고 말이지.
애매한 건 도대체 누구한테 화를 내야할지 모르겠단 거야. 정치에 관심도 없는 주제에, 새삼 육아 정책의 부재를 탓할까?
누구에게, 제 밥그릇 싸움에 눈이 벌건 국회의원들? 빙충이 대통령?
결혼하면 아기 낳으라, 낳으면 둘째도 가져야지 부추기는 사람들은 잔뜩 있는데 정작 필요할 땐 아무도 없는 현실?
연로하시고 편찮으신 양가 부모님들??



아님...




서진이?

 

 

 

 

 

 

 

+ 결국, 독백은 마음에 담아두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하루 내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J가 화가 났냐고 물어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이 긴 포스팅을 작성하면서, 그리고 생후 6개월째인 서진이 사진들을 하나씩 보면서
좀처럼 웃지 않는 엄마 얼굴을 자꾸만 올려다 보며, 웃고 또 웃어주는 아기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설령, 마지막 기회를 접고 이제부터 전업주부로 영원히 돌아오더라도,
행여 나중에 아이에게 신세한탄이나, 원망을 퍼붓거나
'내가 이래뵈도 소싯적에 말이야..' 하면서 꼴사납게 지난 일들을 들먹이며 자화자찬 하거나
하는 식으로 추태를 부리진 말자고. (..) 그렇게 변해가지 않았으면 진심으로 좋겠다고.



+ 그래도 좋았잖아. 잠시지만 꿈을 꿀 수 있었으니.  

 

 -----------------------------------------------------------------------------------------------------------------------

 

 

 

 

블로그에 쓸 때랑은 달리 별로 괜찮지 않습니다. 마음이 안 달래지네요. (허허)

커피 마시면서, 한숨이나 뻑뻑 쉬고 신랑 원망하고 나라 원망하고.. 그러고 있네요.

 

아기 백일 사진이나 보면서 마음을 달래야겠습니다. 긴 푸념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_(_ _)_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39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1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898
112050 웹툰 모두에게 완자가... [11] 스코다 2012.07.08 3961
112049 [벼룩] 휴고보스 남성용 팬티 변태충 2012.06.19 3961
112048 강용석 의원이 제주도에서 폭행 당할 위험에 처해 있네요. [35] 완성도 2012.03.09 3961
112047 응답하라 1994가 좋은 이유. [16] mad hatter 2013.11.07 3961
112046 남규리 시구했네요 [12] 가끔영화 2011.07.30 3961
112045 부모님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책 [13] 빠삐용 2010.11.02 3961
112044 오늘의 웃긴 짤방 [13] nobody 2010.09.29 3961
112043 밀크빙수 [10] 미나 2011.07.30 3961
112042 한국 드라마와 예능에 영향을 준 작품은? [32] 보이즈런 2011.12.27 3961
112041 '나 혼자 산다' 데프콘 "동생과 살기위해 하차 결정" 18일 작별 방송 [8] 달빛처럼 2014.07.16 3960
112040 추석선물세트의 진실. [8] 자본주의의돼지 2013.09.13 3960
112039 80년대 일본 코카콜라CF를 보니 기분이 묘하네요. [19] 무비스타 2013.07.18 3960
112038 서양이 동양보다 천년은 뒤지는 것 [8] 오맹달 2013.01.11 3960
112037 친박단체 “표 모아달라” 대학생 룸살롱 접대 [12] 겨자 2012.08.22 3960
112036 무릎팍 첫 게스트는 정우성이군요. [10] 자본주의의돼지 2012.11.05 3960
112035 애인이 바람핀 꿈을 꿨을 때, 깨고나면 기분이 어떠신가요? [19] 난데없이낙타를 2012.01.05 3960
112034 참 별 희안한 걸로 꼬투리 잡고 웹상에서 감정 표출하고. 문재인 후보집에 있는 의자 이야기입니다. [21] chobo 2012.11.28 3960
112033 내인생에 영화 Best 10 [11] 무비스타 2010.11.15 3960
112032 루리웹 프로작가 소동 [17] 사과식초 2011.10.27 3960
112031 우연치 않게 엄청난 걸 보게 되었습니다;;;; [4] 흐흐흐 2013.10.09 395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