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 때문에 울었다.

2012.08.12 20:34

닥호 조회 수:4619

초등학교 4학년때 그 때는 강아지였던 차돌이는


맞벌이 부부셨던 부모님의 부재 속에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었고


나의 우울했던 사춘기를 묵묵히 지켜주었습니다.


성질도 만만치 않아서 툭하면 물리고 물어서 혼나도 안고쳐지던 개같은 성질이었고


언제 어디에 내놔도 참 여우같은 미모를 지니고 있어서


어느샌가 화난 것도 금방 잊어버리고 이뻐해주곤 했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쾅 닫은 문에 앞발을 찧어 한달동안 앞발을 절고 다녔고 그 후에는 그런 적 없는 양 잘도 돌아다녔습니다.


또 바보같던 어릴 적의 나는 차돌이 머리에 장난삼아 테이프를 끼웠다가 못빼서 죽는 거 아니냐고 엉엉 울다가


아버지가 퇴근하셨을때 그 앞에 납작 엎드려 차돌이 좀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테이프는 칼로 잘 잘랐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서 웃으십니다. 퇴근했더니 딸년이 납작 엎드리며 죽여주세요.... 했다고...


먹을 것에 욕심도 많아서, 그리고 그 먹은 것들을 꼭 어딘가에 감추는 버릇도 있고


밖에 무슨 일이 있으면 짖는 통에


이웃사람들에게 무수한 민폐를 끼쳐서


한때는 친척집에 맡겨진 적도 있었습니다.


3번이나 임신하여


한번은 사산해서 중학생이었던 나는 차돌이가 불쌍해서 어떻게 해 하고 엉엉 울었었고


두번째 세번째는 새끼를 잘도 낳아서 아는 분들에게 분양했더니


이식히들이 다 뭔 짓을 했는지 다 죽었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세번째 새끼 중 유일한 암컷이었던 아롱이만 곁에 있었습니다.


아롱이는 키워놨더니 지 엄마보다 덩치가 크다고 툭하면 지 엄마를 물어대는 통에


자식은 키워봤자 웬수구나.... 라는 진리도 가르쳐주었습니다.


어느샌가 나이가 들어 지방종이 란 것이 배 부위에 자라나서 볼때마다 걱정을 시켰고


병원에 데려갔더니 너무 늙어서 수술은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수의사 선생님께서는 지방종은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산책을 나가면 1미터마다 영역표시를 해대는 바람에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리고 자기보다 큰 개를 보면 무서워서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 털도 빠지고 희어져가고 수염도 희어져가고 이빨도 다 빠지고 코도 까실까실해지고 눈도 점점 하얗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뛰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지만 이것이 세월이라는 것을 나에게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차돌이가 오늘 죽었습니다. 17년. 개로서 아주 긴 생입니다. 숨을 천천히 쉬다가 조용히 갔습니다.


차돌이가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제 끝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무덤덤했습니다.


죽었다는 소식을 전화로 들었을 때에도 나는 그래 그렇게 됐구나. 오래 살았다. 생각했었습니다.


...


아니었습니다.


나는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소리내서 엉엉 울었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엄마. 나의 유모. 나의 부하. 나의 상관. 나의 인형.


내 인생의 절반의 시간을 같이 알고 지냈던...


슬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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