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지도교수님이 퇴임을 하십니다.

그리고 전 만년 막내로서 으레 그랬듯, 졸업한 OB 선배들 연락을 맡게됐죠.

명단을 펴놓고선 조심스레 전화를 돌립니다.

괜히 긴장되게 마련인 낯선 선배들을 지나니, 이제 좀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띄네요.

그 이름 중 잠시 저를 멈칫하게 만든건 K...




아무것도 모르던 새내기 입학식, 처음 만난 K누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생글생글 아름다운 웃음만큼이나 착한 그녀였지만, 최고학번이라는 타이틀의 위압감은 괜스레 저를 위축시키곤 했죠.

수채화 같은 4월 이야기의 로망도, 롤러코스터 같은 논스톱의 설렘도 모두 거짓임을 깨달아가던

스무살 어느 봄날의 지도교수 모임, 어쩌다 대화 주제는 음악으로 흘러갔습니다.

모두들 대세였던 소몰이 얘기를 하는 통에, 턱을 괸 K의 표정은 몹시 심드렁했어요.

옆에서 잠자코 있던 전 조용히 K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누난 가요 별로 안 좋아하죠? 어떤 음악 좋아해요?"

멍때리고있던 K는 깜짝 놀라 괸 손을 풀며 말했습니다.

"어? 나? 음... 뉴에이지 많이 들어"

"아 그렇구나, 누나 예전에 관현악반 했다지 않았어요?"

"응, 근데 난 아무래도 혼자 피아노 치는게 더 적성에 맞나 봐∼"

"아 저도 피아노 오래 쳤는데!"




사실 락커가 되겠다며 피아노를 때려친지 5년도 넘었었지만, 지금도 피아노를 치고 있는 양 속사포 개드립을 털던 저...

헌데 쇼팽보단 모짜르트를, 유키 구라모토보다는 조지 윈스턴을 좋아하던 둘의 취향은 꽤나 비슷했고, 그때 삘받아있던 K는

술김이었을까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 피아노 영화 개봉하던데 보러갈래?! 호로비츠를 위하여라고∼∼"





그렇게 얼떨결에, 대학와서 처음으로 데이트란걸 하게 됐습니다.

K는 6살이나 어린 후배녀석 앞에서 아주 편하게 웃고 떠들어댔지만

남중남고 출신 스무살의 긴장은 좀처럼 풀릴 여지가 없더군요;;;





밥먹고 찾은 영화관, 이 또한 여자와는 첫 경험입니다.

팝콘 대짜를 두 손으로 들었다, 한 팔로 감쌌다 어처구니 없는 어리버리를 떨며 상영관으로 입장.

처음엔 제 쪽에 팝콘, K쪽에 콜라를 뒀는데... 앉고보니 K는 팝콘 학살자로군요?

그럼 그냥 팝콘 콜라를 바꾸자 하면 될 것을, 전 멍청하게도 K쪽으로 팔을 뻗어 불편한 각기를 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K는 심히 영화에 몰입해 있었고, 제 팔은 흡사 팝핀현준의 그것으로 ㅠㅜ

그러다 영화 중반쯤에서야 내 꼴을 발견한 K는 입을 막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키득거리는 K를 보고있자니 쪽팔림에 오그라들어 팔의 통증도 사라지는듯한 착각이 ㄷㄷㄷ

그리곤 팝콘통을 뺏어든 K의 귓속말

"몰랐는데 너 되게 귀엽네?"

제 볼을 꼬집은 K는 활짝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픔과 쪽팔림과 설렘이 오묘하게 섞였던 그 순간, 평생 잊혀지지 않을 그 환한 미소.





... 물론 그리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K는 얼마 후 동기 오빠와 커플이 되었고, 저는 동방에서 기타 솔로를 연습했죠.

그리고 몇 년 만에 연락하는 지금, 괜히 쉼호흡을 하며 누른 통화버튼이 무색하게도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




그렇게 K는, 그때도 지금도 제게는 먼 사람입니다.





첫 데이트의 트라우마일까요.

가끔 여성분과 영화관을 갈 때면 팝콘으로 각기를 추는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건, 옆사람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피식하며 자세를 고친다는 것.

풋풋하고도 황당했던 스무살의 그 녀석은 여전히 살아있는걸까요.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영화를 볼 때 팝콘도 먹었습니다.

그 녀석과 K를 떠올리며.

물론 혼자서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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