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홍수로 마을이 잠겨 집을 떠나야 했던 일이 있었어요. 제가 자란 시골 마을은 들판 한 가운데 큰뜸, 작은뜸 합해서 겨우 사십여 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이었어요. 동네 어귀의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이 걸음으로 이십여분은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였죠. 마을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직선 도로였어요. 마을과 가까운 길은 비포장도로로 시작해서 정류장에 가까운 중간쯤부터는 새로 닦은, 이상한 길이었죠. 마을 사람들은 그 길을 뜻 그대로 신작로라고 불렀어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전 대통령인지 노 대통령인지 아무튼 대통령이 언젠가 우리 말을 앞을 차를 타고 휙- 지나갈 일이 있었는데, 그 날을 대비해 눈으로 가늠할 수 있는 거리만큼만 길을 닦아놓은 거랬어요. 대통령 보기에 흡족하시라고 작은 동네로 진입하는 길도 하얗고 딱딱한 길로 새로 깔아놓은거죠. 자전거를 타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저는 맑은 날에는 비포장도로가 더 좋았어요. 잘 다져진 흙길을 바퀴가 단단하게 누르고 굴러갈 때의 속도감이 핸들에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도 좋았고 가끔씩 조그만 돌멩이들이 바퀴에 치여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보는 것도 묘한 즐거움이었죠. 또 일정한 거리마다 농수로가 가로로 지나가는 까닭에 조금씩 언덕이 졌는데 그곳에서 조금 더 힘을 줘 페달을 밟으며, 한 고개, 두 고개, 세 고개-하고 헤아리곤 했어요. 고개를 열개쯤인가 넘으면 버스정류장이었던 것 같아요.   

 

버스 정류장 뒤쪽으로는 어른 걸음으로 십여분 걸어가면 또 다른 마을이 나왔고 그 마을 뒤로는 큰 산이 있었어요. 어릴 때, 그 마을에 산이 있다는 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우리 동네는 들 한가운데 있어서 큰 소나무도 없고 어디 높은 데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도 없었죠. 그 마을 아이들은 눈이 오면 비료푸대로 눈썰매도 탄다는데 우린 고작 논두렁 아래로 두어바퀴 몸으로 데구르 구르는 게 전부였죠. 봄이면 마을 뒷산에서 나물도 캐고, 학교에서 철마다 잔디씨 받아오기 숙제를 내주면 그 마을 아이들은 하얀 봉투를 가득 채워 잔디씨를 가져왔는데 우리 마을 아이들은 반도 채우기 어려웠어요. 도대체 잔디가 있어야 씨를 따죠. 우리 마을에서 보면 그 마을 뒷산이 올려다 보였어요. 마을에 산이 있다니- 아, 저 산을 우리 마을로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진심으로 궁리하곤 했어요. 하, 이해들 못하시겠죠.

 

같은 반 단짝이었던 순희가 그 마을에 살았어요. 순희네 할아버지는 갓 쓰고 한복 입고 매일 긴 곰방대를 물고 계신 그러니까 청학동 스타일의 할아버지셨는데 가끔씩 순희네 집에 친구들과 놀러가면 할아버지는 우리를 사랑방에 앉혀놓고 호구조사를 하셨어요. 건너 마을에 소도 팔고, 딸자식도 시집 보내고 하던 시절인지라 두루두루 소 안부, 자식 안부 묻느라 그러셨던거죠.  네 성이 무어냐. 네가 누구집 자식이냐, 너희 이웃집에 아무개가 살지? 네 마을 이장이 누구냐. 그 옆 집에 사는 아무개가 나랑 일정 때 같이 기차를 탔었지. 뭐 이런 얘기들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다리가 저리도록 앉아 할아버지 말상대가 되어 드리다가 열어놓은 사랑방 뒷문으로 무심코 밖을 보면 언덕 아래로 근사하게 펼쳐진 들녁,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우리 마을이 있었어요. 볼때마다 괜히 마음이 뿌듯해지는 우리 동네요. 어느 초가을에 처음 보았어요. 순희네 집에서 정신없이 뛰어 놀다 무심코 그 문을 확- 열었는데 황금빛 가을들녁의 톤앤매너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 마을 풍경이 거기 펼쳐져 있었어요. 숨이 헉-하게 차며 어린 마음에도 우-와, 멋지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베시시 웃음이 났죠. 혼자 '들섬마을'이라고 이름 붙여놓고 몰래 애정했던 우리 동네, 진짜 그림같았어요.

 

그 해 홍수는 대단했어요. 텔레비젼에는 홍수로 고립됐다가 옥상에서 헬기로 구출되는 사람들을 자꾸 보여줬죠. 지척에 강을 두고 있던 터라 강이 범람하면 마을이 순식간에 물에 잠길거라고 어른들은 걱정이었죠. 마루까지 물이 차오를 때쯤 사람들은 언덕 위에 있던 학교로 모두 피난을 갔는데, 우리 집은 할머니가 몇년째 누워계셨던 탓에 마을을 제일 마지막에야 빠져나왔어요. 트랙터 뒤에 실려 큰 바퀴가 물 속에서 달리다 한번씩 수면위로 껑충 올라오는 걸 지켜보며 한 고개- 두 고개- 세 고개 헤아리던 게 지금도 생생해요. 난생처음 트랙터를 타 보는 누렁이는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고 초조한듯 제자리에서 둥글게 둥글게 돌며 자꾸 낑낑 거렸어요. 덜컹거릴 때마다 아고- 아고- 신음을 뱉어내던 할머니 얼굴과 길이 잘 보이지 않으니 버스 정류장을 보고 '뜨시만 가요- 빤뜨시!'하고 재차 강조하던 이장 아저씨의 음성, 내게 우비를 입혀주고 책가방에 교과서, 필통, 실내화 하는 것들을 넣어 다시 비료푸대에 담아서는 내 옆에 두며 단단하게 잡고 있으라고 당부하고는 삽 하나 어깨에 메고 트랙터 보다 앞서 걸으며 발로 더듬더듬 길을 찾던 할아버지의 뒷모습, 트랙터 핸들을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던 삼촌의 작은 어깨-  물 위에 둥둥 뜬 배처럼 우리는 마을에서 떠밀려 나왔어요. 버스정류장에 다 와서야  길이 보였고 트랙터도 제 속도를 내며 학교로 달렸죠. 내리치는 폭우 사이로 우리 마을이 얼룩얼룩 보였어요. 마을이 자꾸자꾸 멀어지는 것을 보며 어린 저는 그게 왠지 오래 갈 이별처럼 느껴져서 눈물 뚝뚝, 몰래 울었던 것 같아요. 

 

어른들은 학교 운동장에 가마솥을 걸고 하얗게 국수를 삶아 아이들을 먹였고, 정부에서 지급했다는 연두색 담요를 교실 바닥에 깔고 할머니는 앓아 누우셨어요. 동네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모여 있는 게 철없이 마냥 신나기만 했던 우리들은 깔깔대며 뛰어놀다 근심에 쌓여 있던 어른들께 꾸중을 듣기도 했고요. 누군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우리가 아는 지역의 이름과 피해상황이 나올 때마다 모두 귀를 쫑긋 세우며 라디오 근처로 몰려 들었죠. 며칠이나 교실에서 먹고 자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아요. 작은 소리로 콜록 기침을 하면 컴컴한 교실 안에 크게 울려 퍼지던 밤, 두고 온 마을 걱정에 악몽을 꾸다 깨서 다시 혼자 스르르 잠이 들던 기억, 교실 바닥에 책을 펼쳐놓고 숙제를 하던 기억, 할머니가 기력을 찾고는 제일 먼저 내 얼굴을 씻겨주시던 기억, 정부에서 지급한 쌀로 지어먹은 밥이 유난히 거칠고 맛이 없었던 기억 그리고 바깥에서 불어오던 사납고 다양했던 바람 소리, 그런 것들만 떠오를뿐이죠.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우리 마을은 건재했고 어린 나는 지금까지도 줄곧 두고 온 우리 마을을 몰래 애정하고 있다는 사실만 분명할뿐이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창밖에서 무엇에 놀랐는지 누군가 크게 고함을 지르고 지나갔고, 사무실 사람들은 점심 먹을 생각도 안 하고 모두 일만 하고 있는 지금, 서울은 지금 태풍영향권에 있습니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어요. 이 긴박할 때 저는 자꾸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시절 얘기만 두서없이 하고 싶네요. 기억이 자꾸 과거로 향하는 이상한 밤, 아니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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