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태풍)의 기억

2012.08.2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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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가 내습한 것도 아마 추석 전날이었나 당일날이었나, 였을 겁니다.

어르신들이 '사라호' 라고 기억하는 1959년 태풍 사라도 추석 전날 왔었대죠.

매미는 아마 제가 기억하기로 추석 당일이었을 겁니다.

그 때문에 피해자들이 더 많이 생겼으니까요.


큰 태풍이 온다 그래서 외항인 진해항에 있던 수많은 군함들은

동해항으로, 부산항으로 어디로 피난을 많이 갔었더랬습니다.

그 중에 973 양만춘함은 멀리 안 가고 마산항 내항에 있는 우리집 앞에 정박을 했죠.

군항제가 아닌 때에 실물 군함을 집 앞 부둣가에서 보는 경험은 참 이색적이라

태풍 오기 전에 사람들이 막 구경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양만춘함이 우리 집을 살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추석날 저녁, 태풍이 심하게 몰아쳤습니다.

1987년 셀마 때부터 기억에 남아있지만 그렇게 심하게 부는 태풍은 처음이었죠.

바람은, 저녁 8시쯤부터 심하게 몰아치다 11시 30분 즈음 되니 거짓말같이 뚝 그쳤습니다.


정전도 되고 해서, 아파트 사람들은 삼삼오오 밖으로 나왔습니다.

비교적 외곽에 있던 11층 집 베란다 창문이 깨져 박살이 나 있고,

지하주차장에 10cm 정도 물이 찰랑찰랑 차 있더군요.

사람들이 댓거리 쪽에 해일이 일어났다드라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들어가서 다들 잠을 잤죠.


다음날 아침에 동네 쪽으로 나가 보니 헬게이트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지하주차장에 찰랑찰랑 찼던 물이 실제로는 바닷물이었고,

우리 아파트를 제외한 모든 동네 아파트들이 전부 다 해일을 얻어맞아

지하주차장 전체가 바닷물이 들이찼더군요.

심지어 부둣가에서 1.2km 안에 들어가 있는 상가 건물에까지 그 지경.


게다가 부둣가에 쌓여 있던 원목들이 해일 타고 들어와서 여기저기 처박혀 있는데..

그 통나무들은 파도를 타고 건물 입구를 틀어막아, 지하에서 빠져나오려던 사람들을

가두어 버렸고 그래서 안타깝게도 익사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일터로 나가 봤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건넛동네 쪽은 아직 전기가 끊기지 않아, 물을 구하고 목욕을 하러 다녀왔었죠.

하지만 이 동네는 전기 수도 가스가 사흘 정도 끊겨 있었습니다.

라이프라인이 박살나고 나니까 디스토피아 영화 속 세계가 뭔지 대충은 알겠더군요.;;

차들은 온통 바닷물을 먹어 보닛을 열어놓고 햇볕에 말렸지만 당연히 녹이 슬었습니다.


그 다음 날 근무지로 나가 복구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랫녀석 하나가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질 않아서, 전화를 걸어 봤습니다.

이 자식은 집도 코 앞이면서 대체... -_-


"야 임마! 전부 다 쌔빠지게 치아샀는데 니는 지금 뭐하고 안나오노"


"행님, 지금, X눔시로 머리감고 있는데요, 물이 안 나오는데....(울먹)"


".... 새끼, 전화는 우째 받았노. 아라따 내가 일단 계장님한테 얘기하께. 대충 빤스로 닦고 나온나"



중앙재해대책본부에서 긴급발진한 구호물자와 양수기가

재해지역에 도착한 것은 대략 24시간이 채 되기 전이었습니다.


해안지역 지하주차장들이 죄다 물에 잠겨있는 통에 양수기는 24시간 탈탈탈탈 돌아가고 있었죠.

양수기 여섯 대를 동원해서 이틀을 퍼내도 수위는 1미터도 채 줄지 않았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에야 소방차가 겨우 왔습니다. 민간 재산 쪽을 먼저 한다는 원칙 때문에

이쪽은 좀 늦게 배정되더군요. 그리고 반나절만에 물을 다 뽑아올렸습니다(......) 진짜 출력 세더군요.


닷새동안 잠겨 있던 지하실로 내려갔더니 아수라장도 그런 아수라장이 없었습니다.

지하실 철문은 바닷물의 힘으로 종잇장처럼 우그러져 있고, 뻘구덩이에 쓰레기가 뒤죽박죽.

쌀가마니로 쓰는 포대를 들고 장화에 고무장갑 무장을 하고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재 포대에는 꼼장어들이 펄떡거렸습니다. 횟집에서 넘어온 것들이겠죠(....)

두 번재 포대에는 뭔가 빨간색 비디오테이프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습니다. 요건 횟집 옆 비디오집(...)

세 번째 포대에는 컵라면 곽이 산더미처럼 나왔습니다. 매점 아줌마가 안 치우고 처박아놨었구나(....)

네 번째는 포대에 담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었거든요. (....)

양수기로 나머지 남은 바닷물을 퍼내고 있는데 뭐가 턱턱 걸려서,

쓰레기라도 걸렸나 보다 하고 '내가 내리가서 치아고 올께' 하고 내려갔던

놈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죠. 익사체가 양수기 호스통을 막고 있었던 겁니다.


그 후에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내려갈 수가 없어서 다들 사발에 막걸리 한 잔씩 쭉 빨고 치우러 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근무지를 치우는 데에는 그 후로도 꼬박 28일이 걸렸습니다.

그 와중에 외근도 많이 나갔습니다. 대민지원이라 부르는 그겁니다.

공군만 빼고 육군, 해군, 해병대, 특전사, 경찰까지 - 모든 공공 병력들이

삽 들고, 통나무를 끄집어 내고 - 건물 여기저기에 제멋대로 처박혀 있어서 특히 골치였습니다 -

그 후에야 익사한 시신들을 수습할 수 있었죠.

특히나 지하 2층 데몰리션 노래방에서, 추석날 저녁이라고 노래방 놀러 갔다가 그만 변을 당한 사람들이

십수 명 되었습니다. 그 노래방이 무슨 외계 컨셉이랍시고, 구조 생겨먹은 게 큰 홀 안에 움막처럼 생긴

(에일리언의 알 모양..) 노래방들이 겹겹이 있는 그런 구조였으니....

물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냉큼 빠져나왔는데 나중에 나오던 주인이랑 몇몇 손님들은

통나무 때문에 계단통에서 빠져죽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복구는 지루하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도무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죠.

이미 한 번 바닷물이 들어버린 것들은 모두 쓰레기가 되었고, 벽면에는 곰팡이가 슬었습니다.

그 와중에 코리아나의 홍화자씨랑 유진박 바이올리니스트가 위문공연을 오기도 했죠.

문화센터(거기도 해일을 얻어맞아 엉망진창이었음) 홀의 쓰레기를 한 쪽으로 밀어두고

비닐 장판 대충 깔아서, 교단 두 개 이어붙여 만든 정말로 엉성한 무대였습니다. 조명은 딱 두 개.

하지만 프로는 역시 다르더군요.. 청중들이 정말로 위안을 얻는,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위문 공연'이 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진박의 혼신의 힘을 다한 연주들도 정말 좋았구요.

전 웃기게도 '아, 정치인들도 가끔은 세금 아깝지 않은 일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죠(....)


그 때 사람들이 참 정신상태가 피폐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복구작업에 매달리던

동네 사람들이, 그게 일상이 되고 하니까 저녁때만 되면 그렇게 술을 먹고 소란이 벌어지고 하더군요.

저는 기계실 위에 올라가서 발전기 돌리다가 그 옆 통제구역에 있는 공습경보 스위치를 보고

그만 울컥해서 그걸 내리치고 싶었던 충동에 싸였던 적도 있습니다. (만약 진짜 그랬으면

여러분들은 신문 사회면에서 저를 보았을 거고, 저는 이 자리에 없었겠지요. 쿨럭.)



여튼 참... 매미는 저한테는 여러 모로 중요한 기억을 많이 남겼던 사건이었습니다.

불라벤이 불고 있는 한가운데에서 10년 전 태풍을 기억해내는 일도 좀 특이한 경험이네요.

창 밖에 풍력발전기가 - 평소에는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합니다 - 미친듯이 돌고 있는 걸 보니

진짜 바람이 심하게 부는구나 싶습니다. 일도 손에 잘 안 잡히네요. 다들 별고 없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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