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일단 이름과 얼굴을 까는 것을 모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예전 강호순도 그랬고, 이번 고종석이라는 피의자도 유력 언론들에 의해 이름과 얼굴이 까였군요. 그때마다 피의자 인권 유린에 대한 비판과, 이 와중에 인권 타령이냐는 역비판이 오갑니다. 그런데 전, 인권의 측면에서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과연 저게 무슨 효과가 있는 건지가 궁금합니다.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을 까서 얻을 수 있는 게 뭘까요? 가장 직접적인 건 호기심 충족입니다. 어떤 이름의, 어떻게 생긴 놈이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궁금하긴 하죠. 이름과 얼굴이 까이면 그런 호기심을 채워주고 신문을 많이 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언론도 이걸 이유로 내세우진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중의 호기심에 봉사하는 걸 언론의 사명이라고 떠벌리는 건 좀 아니거든요. 그래서 "추가적인 피해 예방" "강력범죄자가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게 하기 위해" 등의 이유를 댑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름은 차라리 이해가 됩니다. 대체로 2~4글자로 이루어진 이름은 외우기 쉽죠. 유영철이라는 살인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면, 나중에 유영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저에게 수작을 걸어온다면 경계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동명이인들이 피해를 보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치죠 뭐. 특히 언론에서 한 번 빵 터뜨리고 이후 후속 진행은 보도도 안하는 현상에 질려버린 저로서는, 강력 사건이 터지면 해당 사건이 법원에서 진행되는 현황이 궁금합니다. 그걸 알아보려면 몇 가지 정보가 필요한데 그 중에 하나가 이름이죠. 그래서 사실 중요사건이 터지면 피의자의 이름이 되게 궁금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거 궁금하다고 피의자 이름을 까자고는 못하겠어요.

 

근데 얼굴은? 대체로 공개되는 사진이라는 게 검찰에 호송되는 과정에서 찍은 사진이기 때문에 별로 알아보기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얼굴은 기억하기도 어렵죠. 당장 지금 눈앞에 사진 4~5개 펼쳐놓고 강호순을 골라내보라고 하면 과연 몇 명이나 골라낼 수 있을까요?

 

추가적인 피해 예방? 그 범인은 잡혔잖아요? 재판 과정에서 무죄가 증명되어 풀려난다면 예방해야 할 피해가 아예 없을 것이고, 유죄판결을 받아 10년 뒤에 사회에 나온다면 10년 전 사진 기억해서 과연 조심할 수 있을까요?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게 한다? 그럼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선고하면 됩니다. 양형의 적절성에 대한 토론은 따로 해야겠지만, 일단 우리 사법체계에서 죄 지은 사람이 판사가 때린 형량을 채우고 나왔으면 다시 사회에 발붙이고 잘 살 수 있게 유도하는 게 맞는 거 아니었습니까? "형무소"가 "교도소"로 이름이 바뀐 것도 그런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알고있는데, 교도소에 갔다 온 사람은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게 하겠다라...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겠네요. 사회를 떠나야 하니까, 자살하거나, 다시 죄를 짓고 교도소로 가거나. 이민도 돈 있어야 가는 거고.

 

결국 아무리 고상한 척 얘기해도, 강력범 얼굴 까기의 본질은 그냥 '호기심 충족'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뭐 딱히 실용적으로 쓸모는 없지만, 당장 어떤 놈인지 궁금하긴 하고, 근데 마침 신문에서 까주면 "아 이렇게 생겼군" 하고서 호기심을 채우고 이 사건은 만족스럽게 잊을 수 있죠. 근데 정말 그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일까요?

 

p.s. 한편에서는, 그렇다면 이미 자백한 범인에 대해서는 이름과 얼굴을 까는 게 어떠냐? 고도 합니다. 이 역시 무슨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엄한 사람을 잡을 수 있다는 비판을 피하려는 거겠죠.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고숙종 사건이 인용되어 있더군요. 당시 고숙종씨는 엄청 고문받고 허위자백을 해야 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이젠 그렇게 고문하지 않으니 자백한 범인에 대해서는 까도 괜찮지 않냐? 고 할 수도 있죠. 하지만 당장 몇 년 전에도 경찰이 피의자를 이른바 '날개꺾기' 등의 방법으로 고문한 사례도 있고... 설사 고문이 전혀 없다고 해도, 허위자백의 가능성은 상존합니다. 이걸 생각해보죠. 사법 체계에서 '증명할 수 없는 진실'은 진실이 아닙니다. 난 정말 안했는데, 어쩌보다니 상황이 나에게 불리하다면? 이 때 경찰이 말합니다. "이봐요. 정말 억울하다고 계속 그러고 있는데, 증거가 있어요. 뭐 물론 이게 우연일 수도 있겠지. 근데 판사가 그렇게 생각해줄까? 당신 계속 부인하면, 증거가 있는데도 끝까지 부인하고 반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로 실형 먹을걸? 자,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그냥 자백해요. 그동안 부인했던 건 없던 일로 합시다. 자백하고 반성하면, 검사가 기소유예 해줄 수도 있고, 판사가 집행유예 해줄 수도 있잖소? 유죄라도 집행유예 받으면 형은 안사니까 그냥 똥밟았다 생각하고 살면 되잖아. 어때요?" 여기에 넘어갈 사람이 과연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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