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06 01:39
아주 어릴 때, 여덟살 쯤 됐을까
앞집 사는 여자애랑 싸운 적이 있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걔가 저보고 어린 왕자를 읽었냐고 묻길래
자기 별로 돌아가는 부분이 슬펐다고 하니까
글쎄, 그런 건 없다고, 어린 왕자는 그냥 죽었다고
아니야, 어린 왕자는 죽은 게 아니야, 자기 별로 돌아간 거야
그래서 우린 싸웠죠, 너는 읽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도 읽고, 나도 읽고
다만 우리는 같은 이야기의 다른 면을 보았던 거겠죠
누구는 모자를, 누구는 코끼리를 보듯이
그보다 조금 더 커서, 한 열 두살 쯤 됐을까
가족 중 한 명과 얘기하는 중에 어쩌다 몬트리올 예수 얘기가 나왔는데
제가 그 영화의 마지막 장기 이식 부분이 아름다웠다고 하니까
그런 장면은 없다고, 주인공은 그냥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린 싸웠죠, 너는 뭘 보고 무슨 얘길 하는 거냐며
아니, 그 장면이 없다면 어떻게 몬트리올 예수가 몬트리올 예수가 될 수 있겠어
비록 제가 그보다도 더 어릴 때, 미취학 아동 시절에 그 영화를 봤지만
그게 내가 틀렸다는 증거는 아니죠
그 뒤로 영화를 다시 보고 확인할 기회는 없었지만
지금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런 장면이 있었고, 그래서 영화는 신화를 완성했었다고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은 프로크루스테스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기 침대에 맞춰서 모든 이야기를 자르고 늘리고 하는 거죠
나에게 있어서는 결코 편집될 수 없는 부분이
당신의 침대에는 맞지 않아 잘려나가고
당신에겐 불필요한 부분이
나의 침대 위에선 지나치게 과장되는 거예요
우리의 책에는 언제나
서로 다른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겁니다
문제는 그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문장에 밑줄을 그어왔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또한 그만큼 쓸쓸해지기도 하지요
'밖에 비가 옵니까?'
계단 저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
머리가 하얗게 벗겨진 노신사가 제 쪽으로 손짓을 합니다
아니요, 비는 이미 한참 전에 그쳤습니다
펼쳐진 우산을 그제서야 겸연쩍게 접으며 저도 외쳐 말합니다
대답이 들리지 않는지 몇 번을 되묻고는
고맙다며 굳이 눈을 맞추고 허허 웃는 노인
저 역시 따라 웃고는
돌아서 걸으며 자기 자신에게 들리라고
조용히 '현재'라고 말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다른데요.
매일 어제의 나같은 모습을 유지하려는 늙어 굳어지는 몸뚱아리와 정신머리만 의식하고 살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