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제가 한창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어서 몸이 달았던 이십대, 아무 작가 아무 책이나 닥치는대로 읽었던 시절, 수작범작태작 필사하고 싶도록 만드는 넘을 수 없는 작품 등등으로 제 머릿속이 오만가지 남의 이야기로 넘쳐나고, 고전 중의 고전으로 남들과의 독서량을 경쟁하고 한창 냄비처럼 들끓던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뭐니 알지도 못하고 썰을 늘어놓으면서도, 물정 없이 허영심만 많아 나도 감히 당시 제일 잘 나가던 은희경 신경숙 라이벌(?) 구도와 이제 막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조경란 등등을 뛰어 넘는 소설가가 될 수 있다고 넘쳐나는 근자감을 주체할 길 없이 오히려 고통을 받던 그 때. 그중 제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작품은 다름 아닌, (저는 정말 좋아하지 않았던 문체를 구사하던) 신경숙 작가의 '전설' 이었습니다.  당시 무슨 상 받고 자전작으로 내놓았던 작품이었는데, 저는 이 작품을 읽고 작가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만행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리고 통화는 생각보다 쉽게 연결되어 이 작가와 이십여 분 가까이 떠들었던 (객기 넘치는)기억이 있어요.그니의 조분조분한 목소리로 제게 했던 작품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등은 지금 생각만 해도 참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는데, 순전히 제가 그 분께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전설' 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이 참, 너무 낯설면서도 한없이 아련하게 마치 내가 1940~50년대 어느 한 순간 살다 죽어  199*년 다시 환생해 살고있는 것 같은 어처구니 없는 환상같은 것이었어요. 그 작품은 작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제가 소설을 미친 듯(?) 써대던 어느 싯점까지, 그리고 그것을 돌연 중단한 이후 지금까지 마음 어딘가에 압정으로 꽂아놓은 쪽지처럼 그렇게 남아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태풍전야라는 오늘 오후, 전날 후배의 결혼식과 지인들과의 만남으로 명동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한낮이 되도록 잠들었다가 밀린 집안청소와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마치고 몸과 마음의 붓기를 빼려고 찾은 일요일 오후의 헬쓰크럽, 어쩐지 경미한 통증이 느껴지는 대퇴부의 근육을 살살 달래며 평소같지 않게 천천히 걸으며 무심코 켜놓은 티비에서 방영되던 이 영화를 보고, 오래 꽂아두었던 압정을 빼고 꼬깃하게 접은 쪽지를 다시 펼쳐읽는 것 같은 마음이 들면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는 것이죠. 울고 싶은 것도, 어차피 일요일의 헬쓰장엔 사람도 없는데 깊고 낮은 탄식을 하며 감동받은 내색을 그냥 했어야 하는지...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영화 제목을 기억해 뒀다가 좀 전에 검색해보니 그것이 송일곤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고, 아아, 역시 (그의 작품을 한편이라도 제대로 본 적 없는데) 그랬군, 이러면서, 어쩌면 신경숙 작가의 소설과 송일곤 감독의 작품은 닮은 구석이 전혀 없지만, 제가 불현듯 소설 작품을 떠올린 건 영화의 옴니버스 구성 중 하나였던-안타깝게도 소제목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 이제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홀로 그리워 하며 젊었던 시절의 아름답던 사랑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회상하던 중 편지를 낭독하던 씬이었습니다. '매력적인 아가씨께' 로 시작하는 그 편지는 금세 배우 장현성의 목소리로 대체되면서... 그래서 저는 '전설' 이라는 작품을 떠올리고야 만 것인데.

 

   남들은 별 관심도 없을 이런 얘기를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시작하고 짧게 끝맺으려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저는 사람으로 태어나 (성차별적이고 전근대적인 발언이라해도 할 수 없겠지만) 아니 여자로 태어나 남자에게 그런 꿈과 같이 애절하고 진심어리고 그러나 그것이 애끓는 사랑의 무게에서 기인함으로 두고두고두고 눈에 머리와 마음에 새겨 하나의 경전이 되어버릴 만큼의 연서를 받아본다면, 그 자체로 내가 여자로 태어나 사랑받는 그 절정감의 최고치가 아닐까 라고 감히 말하고 싶더라는 겁니다. 물론 연서는 영화에만 등장할 뿐이지만 소설이나 영화 두 장르 다 자신이 사랑하고 또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아 본 여자들에게, 오히려 그 기억의 일부분은 이제 혼자 남은 자의 고통과 외로움이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자체로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대단한 역사가 되는지에 대한 경탄이었습니다.

 

   사실 아주 오래 전, IMF때 시작한 직장 초년병 시절, 한강 같은 작가는 커녕 등단도 할  수 없었지만 나도 퇴근 후엔 집으로 돌아와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에 지하철을 타고 동네역에서 내려 마구 집으로 달려와 새벽까지 글을 쓰고 어딘가에 공모를 준비하느라 원고지 몇천 장 분량의 장편소설을 탈고해 본 적이 있는데, 그 소설 속 이야기 중에 제가 썼던 어떤 한 챕터는 온통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시 저와 한창 연애하던 남자에게 밤마다 전화기 너머로 제가 쓴 소설들을 읽어줬는데 문장을 읽는 음성이 말소리와 다르게 매력적이었는 지, 맨날 혹평만 하던 남자친구로부터 그거 정말 네가 쓴 게 맞냐는 칭찬을 듣고 너무 으쓱하던 기억이 나요.

 

    신경숙 작가의 전설도, 송일곤 감독의 시간의 춤도, 제가 쓴 조잡한 장편소설의 일부분에서도 저는 늘 꿈꾸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발설해서는 안 되는 제 오래된 열망 하나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요즘같은 세상에, 게다가 잘나고 공정한 사람들로 차고 넘치는 듀게에서 이런 속엣얘기는 코웃음을 살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겉으론 쎈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충분히 독립적인 척, 사랑을 하는 것이 받느니보다 행복하다며 수동적인 사랑 따위 필요없어 라고 위장해보지만, 사실 주절주절 늘어놓은 모든 것을 다 부정하며 요약하는 한 마디.  (제가 이성애자이므로)  남자로부터 그렇게 극진하고 애틋하게 사랑받고 보호받는 그리고 그런 남자 밑에서 그냥 고양이처럼 새침하게 애교나 떨고 귀여움 받으며 여자로 갖고 태어난 모든 아름다움과 매력 다 뽐내고 과시하며,  아무 것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것 할 줄 모르는 백치같은 여인네로 죽을 때까지 흠뻑 사랑만 받다 인생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 여자로 태어나 이보다 더한 행복과 호사가 또 있나요? 사실, 사랑밖엔 난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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