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뒤의 식단공개

2012.09.17 22:51

벚꽃동산 조회 수:4627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비도 내리고 달리 할 일도 없어 사진 정리를 하다 보니,

 

얼마전 생일이 있었군요. 이제 만으로도 꽉찬 스물 다섯이 되었습니다.

만으로 세어 주세요. 만으로 세지 않는 분은 사람이 아니무니다.

 

겸사겸사 친구들과 만나 생파-_-도 하고 집에 내려가서 엄마한테 생일밥도 얻어 먹고 올라왔습니다.

 

 

 

우리 엄마는 천사!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집에 내려와 친구들이랑 술이나 처먹고

싸구려 스카프 사와서 낳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며 뻔뻔하게 얼굴부터 들이미는 딸래미 뭐가 이쁘다고.

아침부터 버섯 넣은 미역국에 각종 나물에 잡채까지 무쳐 주셨어요.

이제 올해쯤 되니 엄마한테 제대로 된 선물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반백수 고시생 딸은 그저 읍소만.

 

친한 친구들도 만나고 엄마한테 맛난 밥도 얻어 먹고 아부지께 애교 떨어 용돈도 챙겼는데

이상하게 생일 전후로 달갑지 않은 슬럼프의 전조가 느껴져 문득 긴장.

멘붕의 주화입마, 깊고 아득한 감정의 나락.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워만 있고 싶을 때, 나도 모르게 책상에 개켜두지 않은 빨래거리가 쌓여 갈 때.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싱크대 앞으로 가게 됩니다.

 

괜히 국도 새로 끓이고 나물도 몇가지나 무치면서 부산을 떨다 보면 왠지 마음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그리고 아침으로 시래기랑 콩나물 잔뜩 넣은 소고기국 데워내고, 갈치는 오븐에 넣고, 마른김도 요리조리 구워서

어제 무친 나물과 한상 차려 식사를 하면 좀 안심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면 모든게 fail.



점심저녁 모두 정구지 찌짐과 칭타오로 떼우고 넘어가기도 했어요. 그 놈의 볼라벤 덕분에.



 

 

불안이 정점을 찍을 때면 손으로 꾸물럭대며 만들어야 하는 걸 생각해냅니다.

기본적으로 손재주가 없는 편이라 빚고 모양내는 건 거의 손대지 않는 편인데도요.

 


양파랑 당근, 파를 다지고 두부도 보에 싸서 물기 꽉꽉 짜냈지요. 고기는 소고기 안심.

 

 

 

세월아 네월아, 노래 틀어 놓고 동그랑땡 열두개와 햄버거 패티 두장을 만들었습니다.

손이 (물리적으로) 커서 반죽도 크게 만들어 졌어요.

  



계란물 살짝 입혀 노릇하게 구워내면 이틀치 반찬은 되는 동그랑땡 완성.

 

 

그리고 다음날 아침엔 김치찌개 끓여서 남은 나물반찬에 동그랑땡 데워 냈지요.

나머지 반찬은 깻잎장에 계란말이, 묵은 김치예요.

 

 

 

 

스터디가 있어서, 약속이 있어서, 데이트가 있어서 화장도 하고 치마도 입고 가죽백도 메고 나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이죽거리며 한참을 떠들다 들어오면

괜찮은 것 같다가도 이소라 노래나 틀어놓고 소주병 일렬로 세워놓은 채 책상 위에서 잠들고 싶어 집니다.

숙취에 자괴감이 들 것이고 그 무력감에 또 낮잠이나 잘 요량으로요.

잘 알고 있어서 너무나 무섭지만 지금 저의 생활은 제가 스스로 중심을 잡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지기 십상이라

정해놓은 공부량을 지키고 그나마 집에서 먹을 땐 제대로 챙겨 먹고 최소한의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누구보다 정말이지 잘 알고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눈감고 이불 속으로 숨고 싶은 마음이 드는거죠.

그래도 이번 슬럼프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서 뺨을 쳐가며 일어나 안 만들어 본 걸 만들어 보자! 며 씩씩거리며 슈퍼까지 나가서 두반장을 사왔습니다.

 



 

처음 만들어 보는 마파두부.

 

 

 

냉장고에서 오이가 죽어가길래 소금물에 바득바득 씻어서 오이 소박이도 만들고요.

 

 

 

싼 맛에 사온 가지로 나물 하려다 좀 더 손이 가는 가지튀김도 했지요.

 

 


엄마가 보내주신 장어국 냉동실에서 꺼내 끓이고 마파두부 덮밥에다가 가지튀김, 오이소박이에 남은 계란찜.

어린잎 샐러드도 같이 냈어요.

 

 

압력솥에 영양밥을 할까 하다 아차, 우리집엔 압력솥이 없지.

바보 도 트이는 소리를 혼자 중얼거리며 냄비에다 표고버섯 말린 것 잘게 썰어 표고밥했어요.

 

 

 

약속도, 스터디도, 수업도 없는 날엔 혼자 마트를 쏘다니며 두시간 넘게 장을 보기도 합니다.

그래봤자 손에 들고온 건 떨이용 조개랑 새우가 다였지만,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는 상품의 홍수 속에서 아무거나 집어 들어 뒷면에 적혀 있는 첨가물 따위를 꼼꼼하게 읽다 보면 두시간 쯤은 껌이죠 뭐.

  



백합과 모시조개는 해캄하고 새우 등에 있는 내장도 꼼꼼하게 발라내준 뒤 고추기름에 이렇게 볶아줘요.

순두부찌개를 만들었는데 어째서 완성샷이 없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날 아침엔 조기를 굽고 박나물을 무쳤어요.



 

다시마는 집에서 얻어온 것이고 배추나물은 저번에 무치고 남은 것 중 마지막. 마늘 장아찌는 참 오래도 먹네요.



조개 잔뜩 넣고 끓여서 시원하고 칼칼한 바람에 남은 건 소주 안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후문이.

 

  

동생이랑 같이 살고 있긴 하지만 생활패턴이 달라져서 영 같이 밥을 먹을 일이 없었(다기 보단 천인공노할 짓을 일삼아서 아침에 겸상하고 싶지 않았던게 솔직한 심정)는데

주말 저녁 오랜만에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동생의 주문은 강된장.

언니가 매일 울면서 자든, 새벽 다섯시가 넘을때까지 거실바닥에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든

언니 신발을 훔쳐 신고 언니방에 토해놓는 기지배입니다만 어쩌겠어요.

 

 

하나 남은 가지로 가지나물 무치고 엄마가 보내준 생김치 꺼냈습니다. 양배추도 데치고요.

저번에 재워서 냉동시켜 둔 등갈비도 꺼내고 샐러드는 간단히 씻어서 담아내고, 고등어 굽고 마늘 장아찌 꺼내서 저녁상 완성.

 



사진은 어둡지만 등갈비 맛있게 노릇노릇 잘 구워졌어요.

 


 

강된장은 표고버섯이랑 청양고추 넉넉하게 넣어서 매콤하게 끓였지요.

 

 

그러다 지난 주말, 큰 사고는 아닙니다만 팔 센치짜리 힐을 신고 나갔다가 취중에 넘어지는 일이 발생하여 발목에 온통 멍이 잡혀서

이리 살면 안되겠구나 작은 덩치도 아닌데 옆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싶어-_- 조금 정신을 차렸습니다.

못난이처럼 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쓰린 속을 부여잡고 몇시간 팔팔 감자탕을 끓였어요.

그 날 그렇게 과음할 생각이 없었는데 선견지명이 있었던겐지 외출 전에 돼지뼈를 물에 담궈 놓고 나왔었거든요.

곰솥에 한가득 끓여서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보니 부자가 된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감자탕으로 해장 했어요. 물론 감자는 들어가지 않았지요. 시래기만 잔뜩 넣고 끓인 감자탕.

 



파김치도 새로 무쳤는데 사진은 따로 없네요. 남은 계란말이에 풋고추 곁들여 냈죠.

 

 

 

어쨌든 공식적으로 슬럼프는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험도 마저 준비해야 하고 아직은 올 한해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지지부진 땅파는 일은 고만 하겠어요. 듀게에 징징 거렸더니 그나마 좀 나아지는 것 같지만 동정은 사양 할게요. 돈으로 주세요.

오늘은 폭우를 뚫고 운동도 다녀왔습니다. 부디 작심삼일이 되지 않길 바라면서.

 

 

다음 식단 공개 때는 좀 밝은 모습으로 인사 드릴게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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