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서울을 다 싫어하죠.

2012.09.25 23:19

점례 조회 수:9773

저는 서울이 고향입니다. 서울 사람들은 고향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지만,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까 서울이 고향이지요.

서울을 떠나서 못 산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갈 데 없는 서울촌년seoulite임.

 

오늘 디자인 수업을 듣고 있는데, 주제가 도시(서울)에 대한 글모양typeface 만들기에요. 좀 뻔한 주제 같긴 하지만

불평할 바가 아니므로 진행하고 있는 요즈음인데, 돌아가면서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연구방향에 대한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듣고 있다 보니 좀 묘해지더군요. 간단히 필기한 것만 해도, 연구 주제 중 부정적인 어휘가 굉장히 많았어요.

 

간단히 추려 본다면

고립/중독/과도한 짐/끌려다니는 사람/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폭음/외모지상주의/개인화/

황금만능주의/천민자본주의/외로움/밤/소통의 부재/소통의 난항/아이러니....

 

친구들의 발표를 죽 들으며 휘갈겨 쓴 내용 중에 '왜 이렇게 stressful한가 다들 강박과 시름 등등 서울이 이렇게 stressful한가'

라고 메모한 게 있네요. 도시-특히 서울이라고 한다면, 저는 굉장히 아름다운 게 많이 나올 줄 알았어요,

오히려 아름다운게 너무 많아져서 뻔해지지 않을까 걱정이었거든요. 재미 없는 주제들 뭐 많이 있잖습니까,

좀 뻔하다 싶은 인사동 리디자인 기획이라던지, 고궁이라던지....좀 '아, 이 주제 5년동안 봤어'싶은 것들.

그런데 오히려 그런 것들은 없고, 개인적인 부정적 감성에 치우친 것이 많아서 의아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어요.

 

저는 서울을 기본적으로 우아한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우아한'이란 말은 2학년 1학기에 수업 대충 하던

교수님이 타이포 수업을 하면서(그러고 보니 그것도 typeface수업이었네요) '그래, 서울이 참 어찌 보면 우아한 도시인데'

하고 약간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지나갔는데 마음에 깊이 박혀서 계속 쓰고 있는 말인데요, 그에 더해

저는 이 말을 할 때마다 항상 이 말도 또 얹어서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에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는 진실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그 도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도시는 실로 고상하고 고결해져야 해. 우리가 사백년 동안이나 이 도시를 망치려고 노력해 왔는데 아직도 해내지 못했으니까."

 

제가 강조하고 또 기억하는 부분은 '이 도시는 실로 고상하고 고결해질 가치가 있지...해내지 못했으니까' 부분이에요.

저는 서울이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고, 매력 있고 실로 우아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설명하라고 하면 참 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곳이라고 항상 말하고, 어디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마다 '내가 죽을 곳은 여기지'하고 생각하며 피천득의 '피양 사람은 죽을 때

 머리를 피양으로 하고 죽는다고 한다'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서 25년 즈음을 살아 왔고, 말하자면 이 도시와 줄곧 사귀어 왔지만, 하지만 아직도 서울이 어떤가 하면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물론 좋은 의미지요.  그래서 들으면서 '허 신기하네. 다들 서울을 이렇게 stressful하게 여기네' 싶습니다. 

'보편적인 인간의 스트레스 상황을 도시라는 공간에 결부시킬 이유가 그렇게 큰가'하는 의문도 들고,

'다들 저 감정들을 실제로 느끼는 걸까, 아니면 느낀다고 생각하게 느끼게 되는 걸까'하는 생각도 좀 들고요.

 

실제 어떤 친구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공간-(서울,도시)'라는 주제로 진행하고 하니 가르치는 선생님이

'글쎄, 너희 나이, 학생때들 그렇게 술을 마시나? 그런 문화가 있나? 술문화는 직장 다니는 사람 것이지 학생들이 그래 술을 먹어요?'

하고 반문하더군요. 뭐 그런 사람도 있겠지요마는 우리들이 다 20대 초반이고, 또 돈들이 있고, 편하게 학교 다니는 입장이니까

자기 입장에서는 좀 납득이 안 갔나봐요. 저는 개인적으로 술을 안 먹어서 술문화가 어떤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친구가 말하고자 하는 방향이 신입생, 2학년들의 폭음이 아닌 것 같아서 심정적으로 가르치는 사람 말에 동조하게 되더라구요.

 

하여간 친구들이 요즘 의욕이 없어서 자꾸 진행방향을 엎고 또 엎고 있어서 수업은 그다지 잘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술 수업이라는게 생리 주기처럼 같이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정체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작업 진행이 엄청 느려져요. 다들 진행이 빨리빨리 되어야 서로 보고 배우기도 하고 자극도 받으며 진전되는데,

약 한달이 되어가고 있는데 주제들도 못 정한 사람이 많음.(텄네 텄어ㅠㅠ) 제 주제도 뭐 썩 잘 진행되어 가고 있는 편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파이팅해서 슉슉 나아가고는 있는 것 같은데 좀 뻔한 것도 같고, 이제 실제적인 드로잉을 들어가야 하는데 잘 안 되고,

그래도 추석때 맛있는거 많이 먹고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하면 잘 되겠지, 정도로 무책임하게-_-생각하고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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