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겨울 타는 여자인가 봅니다. 저는 원래 낭만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불타오르는 끈적끈적한 카트린 브레야의 미스트리스와 같은  열정 아니면 웬만한 연애이야기들은 취급도 안 했건만. 어째서인지 외려 연애를 시작한 후, 저 자신의 불타는 끼를 발견하고 무려 영원한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또 생각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수사학적으로 말해서 그렇지 그냥 온종일 사랑 생각만 해요. 요즈음은 철학 생각 아니면 사랑 생각만 합니다. 그냥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라고 써놓고 어제) 앙드레 고르 아저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에콜로지카를 쓴 프랑스 철학자 할아부지라는데 그것보다 사실 저는 그 사람이 아내와 낭만적인 사랑을 나누고, 동반자살했다는 점이 참 다가왔어요. 제가 애인이나 가장 친한 친구한테 말하니 좀 자살한 건 별루다, 라는 반응을 듣긴 했습니다만, 저는 그들이 자살을 한 이유가 한쪽이 다른 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살기 싫어서 아닐까 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그들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생각하고야 말았습니다. 저도 오래 같이 있던 배우자가 죽으면 살고 싶지 않을 거예요.

 

   사실 낭만적인 기분에 취하고 싶기도 했지만, 해야 할 일도 있는 터라 글은 속독했습니다. 철학자 할아버지라 그런지 자기 자신의 사상 이야기를 해서 이 부분은 좀 넘겨야 내가 내일 해야 할 거 준비를 하겠구나 싶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잠시나마라도 앙드레 고르 할아버지의 삶에 발은 담갔었고, 심취했었고, 결국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람 많은 도서관에서 울기까지 하였습니다. 원래 잘 울긴 해서 별 큰 일은 아닙니다. 목도리를 칭칭 목에 동여매길 잘했어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담백한 글입니다.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 삶을 뒤돌아보는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가 보내는 아내에 대한 진실한 찬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일들을 미화하지만도 않았고요.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하였습니다. 이야기만 들어보면, 아니 그래서 그 철학자 할아버지가 20년간 아내 병수발 하다가 아내 죽을 때 되어서 같이 동반자살을 했다는 거야? 이런 사랑이 말이 돼? 싶지만, 읽어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요, 그 사람이 그렇게 사랑을 했다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이 할아버지도 참 나름 한 세대를 풍미한 철학자 할아버지인데, 저는 오히려 인상적인 구절이, 사랑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방법을 못 찾겠다, 였습니다. 저도 사랑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같이 있으면 왜 좋은 걸까, 이 사람이 남자라 좋은 걸까, 이 사람이 어째서 좋은 걸까, 도대체 왜 좋은 것이고, 왜 이렇게 큰 감정을 나에게 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며 이 사람과의 인연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이 사람에게 그렇게 큰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며, 이 사람이 없을 세상을 두려워 하는 것일까.

 

   저는 세상에서 과학을 비롯한 많은 학문들이 규명하지 못하는 게 많지만 의외로 그 중에 잘 꼽히지 않는 것이 사랑, 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정하고 그 정체를 파악해낸다면 저는 그 성과가 우주의 비밀을 알아낸 것의 가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해요. :) 추운 겨울 날, 현실에 존재해서 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취하고 싶으시다면 저는 이 책 추천입니다.

 

 

2.

 

 

   모렐의 발명은 추천으로 읽었습니다. 하루 만에 바쁜데도 불구하고 읽었네요. 상당히 잘 읽히더군요. 송병선 씨가 번역하신 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번역이 잘 되어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가볍고 빠르게 읽었습니다.

 

   블랑키가 제공한 무한성이라는 개념이 보르헤스나 시몬 드 보부아르, 카사레스에게 많은 영감을 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사레스는 보르헤스보다 관념적인 면은 떨어지더군요. 보르헤스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신 같이 경이로운 작가지만, 카사레스는 재기발랄한 소설가의 느낌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나오던 전염병을 기억 속에 묻어두지 않았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이 안 되는 전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가 자신의 영상을 덮어씌우는 부분은 참 좋았어요. 인간의 영원성에 대한 욕망을 보여주기도 했고요. 그것도 일종의 사랑의 표현 방법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보르헤스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이 책은 사실 보르헤스의 서문만으로도 그 감동이 더해요. 보르헤스가 정줄을 놓지 않고 쓴 (현실세계의 한 사람으로 쓴) 서문은 그가 대단한 글쓴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합니다. 그 우아함이나 자제력을 보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강렬한 단편인 '원형의 폐허들'을 쓴 동일한 사람 같지가 않아요. 저는 보르헤스에게 있는 신화성이 그가 관념적인 창조로 글을 쓰기 때문에 제가 그렇게 느끼는 걸까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여러번 게시판에서도 보르헤스를 찬양했지만 정말 몇 번을 해도 질리지도 않네요.

 

   사실 보르헤스를 본 이후로는 약간 저는 문학 작품을 기피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쨌든 모렐의 발명은 상당히 재미있고, 즐거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왜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본 이후로는 저에게 감흥을 주는 작품이 없는 것일까요? 여전히 그 문제가 저를 떠나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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