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물이 흘렀던 시절을 추억함

2012.11.21 01:27

toh 조회 수:968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단어 그대로 literally 콧물에 대한 이야기. 

조금 지저분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쓰는 사람은 진지한 이야기.

.

.

.

 

스마트폰으로 바꾼 뒤로 듀게는 거의 항상 모바일로 접속하고,

대부분의 경우 댓글은 제 마음 속;;;으로만 달고 말기에 통 로그인할 일이 없었지요.

그나마 최근, 11월 들어서 굳이 접속해서 댓글을 단 것이 어느 분의 비염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그때는 차마 못 참고 로그인해서 댓글을 달았더랬죠.

오늘 또 무슨 글엔가 댓글 달까말까 하면서 로그인했다가, 쪽지 온 것을 이제 확인했네요.

덕분에 pc로 접속하여 쪽지 답장 보내고, 생각난 김에 콧물 이야기를 좀.

 

8살인가 9살인가 그때부터 저는 이비인후과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보다 더 전부터도 아마 저는 콧물흘리는 아이였겠지만

'축농증'이라는 병명과 함께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어요.

 

이비인후과에는 항상 아이들이 많았어요. 노인들도 많았고요.

나이대 분포가 모래시계 같았지요.

새 연필 2자루를 이어붙인 듯한 길다란 면봉이 기억나요.

제일 먼저 그 면봉을 코에 푹 꽂고, 의사선생님을 기다리던 시간.

 

동네 아파트 상가에 있던 이비인후과는 나름 유명한 명의였는데

자꾸만 씻지를 말라고 하셔서...

그런데 안 씻어도 콧물이 계속 나서...

그 후로 저는 여러 이비인후과 의원을 전전했어요.

좀 자라서 간, 아주 번쩍번쩍하고 멋진 이비인후과에서는 알레르기 검사를 권했지요.

알레르기라면 먹는 것에나 있는 줄 알았던 저는, 신기해하며 팔뚝에 몇 가지 약물을 발랐고

진드기와 야생쑥에 대해 양성반응이 나왔어요.

 

"쑥이요? 저 쑥떡 먹어도 괜찮던데?"

 

의사선생님은 여기서 말하는건 우리나라 쑥과는 다른, 서양의 어떤 풀이라고 설명해주셨고

엄마는 병원을 나오며 투덜거리셨죠. 돈만 버렸다고.

 

아무튼 저는 콧물을 흘리면서도 잘 살았어요.

신문에서는 겨울철마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는 축농증을 의심해보아라,

코가 막혀서 입으로 숨을 쉬다보면 집중을 못해서 그럴 수가 있다 하는 기사가 났어요.

하지만 저는 원래 그랬기 때문에, 새삼스레 집중력이 떨어지고 그럴 일이 없었어요..

 

열이 나거나 목이 잠기거나 기침을 하지 않고서도

콧물이 흐르는 것은 너무 당연했어요.

겨울은 추우니까, 환절기는 일교차가 심하니까, 여름은 에어컨 바람이 부니까.

한동안 콧물이 흐르다 멈추면, 그 다음부터는 당연스레 코가 막혔고요.

 

어디를 가든 저는 제일 먼저 휴지가 어딨는지를 살폈어요.

외출할 때면 가방 속에 휴지를 꼭 챙겼죠. 휴지는 지갑과 동급으로 중요한 필수품이었어요.

하지만 제아무리 알로에가 함유된 고급 크리넥스라 해도, 결국엔 코 주변 피부가 벗겨졌지요.

어릴 때는 괜찮았지만 화장을 시작하고서는 참 귀찮더군요.

 

물론 이비인후과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한약을 먹었고, 침도 맞았어요. 가장 효과가 좋았던 건 진하게 탄 소금물이었지요.

바닷물처럼 짜고 매운 소금물을 스포이드로 콧구멍 속에 흘려넣으면,

처음에는 꽉 막혀서 아무 감각이 없던 코가 이윽고 뻥 뚫려요. 타는 듯한 아픔과 함께.

 

대학생이 되고서도 저는 콧물을 흘렸고

한 친구가 말하길, 자기 동네에 어떤 아줌마가- 한의사가 아니라 그냥 아줌마가요-

엄청난 침을 놔준다고 했어요. 아주 길고  뾰족한 침을 콧속으로 놔주면 코가 그렇게 뻥 뚫린다고.

야 그건 너무 끔찍한데!

하고 웃었지만 저는 언젠가는 그 친구에게 아줌마 연락처를 물어보리란 걸 예상했죠.

하지만 다행히 저는 아줌마에게 가지 않았어요.

 

그해 여름방학에 저는 비염수술을 했지요.

 

사실 저는 그런 수술이 있다는 것을 몰랐고,

수술이라는 것, 서양의학에 대해서 일반적인 혹은 그 이상의 거부감을 갖고 있었어요.

뭔가 '자연적으로' 낫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던 거죠.

 

아주 간단한 듯이 설명되었던 수술이었고 실제로도 간단했지만 

저는 제 인생 최초로 수술침대에 누워서 무력하게 이리저리 끌려가는 체험을 했고

처음으로 환자복을 입었고, 병실에서 하룻밤 머물러야 했죠.

콧구멍을 꽉 채운 솜, 잔뜩 부어오른 코를 한 채로

"아 수술 참 잘 됐어요."

라고 하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묘한 기분으로 경청했고요.

붓기는 일주일도 넘게 갔어요.  

 

결론적으로 저는 비염수술예찬론자가 되었고

양방에 대해 아주 호의적이 되었답니다.

 

재발한다 어쩐다 말도 많지만 어쨌거나 수술한 뒤로 강산이 바뀌었는데도 

오늘도- 아니 어제- 저는 아침저녁 세수할 때와 점심에 뜨거운 국밥을 먹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코를 안 풀었다고요!!!

 

 

+

비염수술로 인해 양방에 아주 호의적이 된 저는

여드름 때문에 로아큐탄을 총량 복용한 뒤로는 아주아주 호의적이 되었지요.

그럼에도 제 개인 사혈침이;;; 어딘가의 오피스텔에 보관되어 있다는걸 생각하면...

네, 양방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은 이 사회 곳곳에 퍼져 있나봅니다;;;

참고로 저 사혈침은 제가 산게 아니라 엄마 친구분이 사주셨다는 거.

그거 말고도 건강 관련하여  이것저것 사주시고 데려가주시는...

제게 참 과분한 사랑을 주시는 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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