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 호두커피

2012.12.02 23:23

beirut 조회 수:5169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회학 졸업논문으로 홍대 카페거리를 분석한 연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홍대 주변의 카페를 특성에 따라 몇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별로 커피의 평균 가격이나 고객의 선호도 등을 조사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죠. 다양한 조사내용을 바탕으로 홍대 카페들의 네트워크 지도를 그렸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묶여있다는 결론을 지었었습니다. 근사한 초기 설계와는 달리 형편없는 논문이 됐지만, 그 때 발로 뛰어서 조사했던 내용은 아직도 저에게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오늘은 그 내용중의 일부로 카페 소개를 시작할까 합니다. (2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사람들은 어떤 기준으로 카페를 선택한다고 답했을까요? 무려 70%입니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은 분위기가 좋고 인테리어가 멋지다고 인식하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자신이 지불한 커피 가격이 아깝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홍대의 카페들이 외관에 신경쓰고, 직원의 옷차림에 신경쓰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에게 커피맛은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멋있고 친절하기만 하면 아무리 맛없는 커피를 내리더라도 만사 오케이죠. 홍대 카페들의 질적인 성장의 이면에는 아직도 만연하게 퍼져있는 이런 인식이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시작한 이유는, 호두커피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호두커피는 포화상태인 홍대 상권과는 조금 떨어진 망원동에 있습니다. 

 

 '카페인 트럭'의 주인장이 거금을 들여 정착한 곳이기도 합니다.

 

 

 커피 가격은 준수합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커피맛에 어울리는 가격입니다.

 

원두리스트는 보통입니다. 제 생각엔 5종을 운영하는것 정도가 맥시멈인것 같습니다. 생두관리나 운영측면에서 말이죠. 원두 가격 역시 착합니다. 

 

콜롬비아입니다. 클린컵이 좋습니다. 모나지 않고 단촐한 맛이랄까요. 화려하진 않지만 부드러움과 감칠맛이 숨어있습니다. 첫 모금이 조금 거칠긴 했지만 이내 잠들더군요.  

 

에스프레소는 약했습니다. 바디감이 부족하다는게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역시 텁텁한 맛이 없고 깔끔합니다. 에스프레소 혹은 아메리카노로 즐기기엔 적당한 맛입니다. 우유를 이겨내는 맛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로스터에게 직접 여쭤보니 우선은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를 위한 블렌딩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라떼의 경우에도 강한 맛을 내는 블렌딩은 피한 로스팅이었다고 합니다. 연령대가 있는 지역 주민들도 오는 카페라 무턱대고 강한 맛을 내는 커피를 만들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블렌딩은 차차 연구해나가신다고 하니 앞으로도 기대해봐야겠네요.

 

 로스터입니다. 좀 특이하죠? 토리스터라는 로스터에요. 메이드인 대전. 한국에서 직접 만든 수제 로스터기입니다. 처음에는 좀 의구스러웠지만, 커피맛을 보고나니 그런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깔끔한 매장내부. 좌측 하단에 있는 영도 로스터기가 눈에 띕니다. 드립용 그라인더라고 하네요.

 

그라인더는 메져. 머신은 에스프레사(Espressa). 일렉트라계열의 머신이라고 합니다. 가격대 성능비가 훌륭한 머신이라고 하네요.  

 

 

 내부는 수수하면서도 재미있게 꾸며놨습니다. 커피맛과 어울리는 인테리어입니다.

커피맛도, 인테리어도 과도하지 않습니다. 바리스타는 손님이 커피를 마시는데 침범하지 않습니다.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카페다운 카페입니다.

 

멋진 신세계나 범우사 문고판 책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음악은 마그네틱 필드. 69 Love Songs에 수록된 곡들이 흘러나옵니다. 마그네틱 필드를 들어주는 카페는 처음이었습니다. 책이나 음악이나, 범상치 않은 호두커피입니다.

 

 

 

 

카페는 결국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 만들어갑니다. 손님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카페는 만들어지고 변화하죠. 최근 몇년간 홍대에 들어선 수많은 카페들은 그런 손님들의 입맛을 맞추고자 머리아프게 변화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곳을 찾습니다. 하지만 어느 하나 자신들의 커피를 만드는 곳은 없습니다.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마네킹처럼 트렌드만 따라가기에 바쁘죠. 

 

정체성을 잃은 카페들의 시대입니다. 너도나도 돈이되는 카페를 만들다보니 부동산 가격은 올라가고 메뉴나 인테리어는 다 비슷해집니다. 쉽게 그만두기도, 시작하기도 어려운게 요즘의 홍대 카페죠. 논문의 결론은 이와 비슷합니다.

 

호두커피같은 카페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커피를 생각하고 카페를 만드는 주인장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말이죠. 하나같이 똑같고 시끄러운, 분위기 좋고 인테리어 멋진 홍대 카페에 질린 분들을 위해서 말이죠.

 

 

뱀발. 오는길엔 커피상점 이심에 들렀습니다. 연남동 친구들을 모두 힐링시켜버렸다는 그 유명한 레몬티를 먹고왔습니다. 몸과 마음이 허하신분들은 이심을 찾으시길. 새로운 메뉴도 등장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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