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새 책 '가재걸음'이 번역되었습니다.

소개를 할까 하던 차에 진중권 교수의 리뷰가 올라와서 이로 갈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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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책과 지식] 뒷걸음질 치는 역사, 에코의 유쾌한 쓴소리

 

 

 

(전략)

 

 

이 책은 진보의 피로감에 지친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도는 것을 막으려는 에코의 치열하나 유쾌한 저항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 칼럼을 쓰던 시절 이탈리아에서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미디어 재벌이 아예 공적 업무(res publica=공화국)를 집어삼키는 일이 벌어졌다. 베를루스코니는 온갖 비리와 추문으로 국제적으로 경멸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조롱과 경멸로 그를 ‘악마’로 만드는 전략도 그의 인기와 집권을 막지는 못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진보진영은 그를 그저 무식하고 멍청한 인물로 바라보나, 에코는 베를루스코니가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정치인’이라는 시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사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고도의 정신력과 지능적인 통제력으로 ‘빈틈없고 교묘하고 복잡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거의 매일 자극적인 약속과 언행으로 정치적, 사회적 소음을 일으켜 늘 언론의 중심에 선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상업광고의 기법을 정치에 활용하는 셈이다.

상품의 판매원은 고객이 결정을 내릴 때 마음을 사로잡는 단 한 가지만 필요할 뿐이고, 거기에 마음이 꽂히면 다른 것은 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베를루스코니가 정치영역에서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 현상의 새로움을 이해하지 못한 진보진영은 낡은 방식으로 그의 허구를 폭로하려 한다. 그 비판은 굳이 그 메시지가 필요 없는 자기 진영의 사람들에게만 전달될 뿐이다. 대중은 거짓말이 거짓말임을 몰라서 거짓말을 믿는 게 아니다. 믿는 사람은 없어도 광고는 효과가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시감을 주는 것은 10여 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이 상황이 우리의 현실을 꼭 닮았기 때문이리라. ‘베를루스코니는 부자이기에 외려 돈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대중의 환상은 부자이기에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황당한 발언을 연상시키며, 68혁명의 기법을 누구보다 잘 활용한 베를루스코니의 선거전략은 거리에 나붙은 보수당의 플래카드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거기에 대한 진보의 무력한 대응 역시 우리의 현실을 닮았다.

에코는 수준 이하의 저급한 언행으로 외국 정상들에게 질타를 받는 베를루스코니 같은 인물을 국가의 정상으로 모신 데에 대해 정작 이탈리아인이 그리 수치스러워 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의 의아함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

 

- 진중권 동양대 교수. 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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