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빠 이야기



저희 아버지는 베이비붐 세대입니다. (남들 앞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저희'라고 하는 거... 어긋나지요? 올바른 표현 알려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ㅠㅠ)

386이었는데 지금은 나이를 잡수셔서 586이 되셨어요. 

컴퓨터 사양은 앞에 숫자가 올라가면 더 좋아지던데 저희 아버지는 이제 많이 늙으셨습니다.

61년생, 목포 분이시고, 전형적인 운동권 세대셨는데, 거기서 쫌 약간 딴따라 기질이 있으셔서ㅋㅋ

약간 딴 길로 새셨습니다. 탈춤 연극 문예패 이런거 하셨어요.


지금 직업은 교사이십니다. 전교조세요. 근데 공부랑은 상관 없는 학교-_-;에 근무하시는지라 아빠가 정말 한 글자라도 수업을 하긴 하는지는 심히 의심스럽고요.

시계 보는 방법 (시간 읽는 법요. 디지털시계만 읽을 줄 알고 바늘시계는 못 읽는 애들이 많대요), 

글 읽는 법 (거의 반 문맹인 애들이 많다더군요) 주로 가르치시고... 

생활습관 완전 불규칙하고 맨날 라면이나 먹고 늦게 자고.. 이런 애들이 많아서 집에서 요구르트 균 키워다가 요구르트 만들어 나눠주시고..

반에 누가 아파서 결석하면 찾아가서 빨래하고 죽 끓여 주시고 그런 일 하십니다. (하지만 가족들에겐 그런거 없슴다 -.-)

전교조긴 하지만 무슨 사상전파-_- 학습을 통한 이념전달-_-이런거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계세요. 

본인 스스로도 요즘은 막 흙집짓기라던지 오카리나 불기, 피아노 바이엘 치기 이런 걸 통한 소박하고 즐거운 삶을 살고 계심...

저 촛불집회 나간다고 2008년에 이야기하니까 막 학을 떼면서 너는 조용히 가만히 살라고 하기도 하고...-_-;


그렇지만 5.18은 아빠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고, 아빠는 핸드폰 번호를 바꿀 때마다 맨날 518을 집어 넣어요.

그래서 무척 괴상한 번호가 탄생합니다만 신경을 안 쓰심. 518만 들어가면 된다고.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운동권 아버지의 이상한 꼰대 버릇 같은 거겠죠.

근데 진짜 운동권인가? 하고 의문이 생기기도 하는게 아무래도 아빠는 그냥 친구들이랑 술먹고 연극하고 탈춤추고 이런 것만 좋아했을 것 같거든요.

옛날에 뭐 누구 삼촌네 다락방에 숨어들어가서 올려보내는 밥 먹으며 수배 피해 숨어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별로 믿음이 안 가고요.

걍 아빠가 어렸을때부터 저를 앉혀놓고 흔히 '좌빨'스러운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셨기 때문에 그런갑다 하죠.

세상이 부조리하다 이런걸 아주 어렸을때부터 가르쳐주심.

그렇지만 동시에 그런 이야기를 하던 아빠의 어깨에는 항상 한 자락 자부심이 걸쳐져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내가 그때 거기에 있었고, 내가 친구들과 함께 싸웠고, 나는 노력해서 이루어냈다, 적어도 그것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는 자부심이요.

아빠가 젊은 시절 청춘을 다 보내며 이루려고 했던 '그것'이 모 사이트에서는 조롱과 혐오, 반대의 표시로 쓰인다니 저는 그냥 씁쓸하게 웃을 뿐이구요.


근데 어제 그리고 오늘 아빠가 문자를 보냈네요.

첫 문자는 좀 긍정적이었는데, (느리지만 역사는 변한다 믿어라, 분노는 쉽지만 기회는 또 온다... 이런 말들이었어요)

오늘 온 문자는 신문을 끊으셨다는 거였어요.

세상을 등돌리시겠대요. 절독신청을 넣고 대신 창비 구독을 했대요.

아, 아빠는 은백양나무 숲으로 들어가려는 건가, 생각했습니다.

아빠의 좌절은 오늘 그렇게 큰가, 생각했어요. 물론 이런 때에 차라리 불쏘시개로 쓰더라도 한겨레나 경향, 시사인 구독을 오히려 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전 아빠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아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다시 신문 신청을 하실 거라고 믿어요. 

그냥, 슬펐어요. 아빠의 인생이 통째로 부정당했다, 물거품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서.

빨리 다시 기운차리고 일어나셨으면 좋겠어요.

은백양의 숲은 아름답지만, 우린 거기 머무를 수 없죠. 

아빠나 나나, 거기 머무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온 아빠의 문자는 그래서 좀... 마음이 아팠습니다.




2. 우리는 저들을 포용하려 하는데 저들은 우리를 포용치 아니하고



저는 박 후보, 아 ... 아니죠. 이젠 그녀가 나의 대통령이죠.

박 대통령님과 대학 동문입니다.

학교 앞엔 오늘 가보니 빨간 대형 플래카드가 걸렸더군요.

모두의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 서강 가족이 만들어가겠다고.

저거 박 후보의 홍보 구호 맞죠?

듀게에도 한 번 글이 올라왔지만 저는 박 후보 반대 성명을 한 서강 동문 1631명 중 한명입니다. 사실 저것보다 좀 많을 겁니다. 

성명이 발표되고 난 후에 기사를 본 동문들이 뒤늦게 페이지를 찾아와 덧글을 남겼기 때문에...

물론 그 반대성명은 학교 내에서 대열차게 까이고 (1. 왜 맘대로 '동문' 전체의 뜻인 것처럼 대표성을 왜곡하느냐? 2. 같은 학교 사람인데 꼭 굳이 그러고 싶냐? 학교 망신이다)

저기 서명한 사람들은 다 문후보나 이정희 후보 지지자일거라는 둥 북으로 가라는 둥 비웃음을 당했습니다.

그 외에도 정말 우스꽝스럽고 열오르는 일들이 많은데,

뭐 어쩌겠습니까. 이미 학교 내 중립성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인데요. (그럴 수밖에 없는게.. 현 동문회 회장이 전 새누리당 의원이자 박 선거캠프 본부장이시고요. 

지난 7월에 출마선언했을때 동문회보 1면에다 크게 기사 실어줬고요. 2010년에는 학교 신입생 모집 광고에도 박 대통령 얼굴을 실었고요.

서강대 친박 동문 모임인 바른포럼에서는 십알단 운영하다가 들켜서 지금 수사를 받고 있긴... 한데 당선이 되셨으니 뭐 수사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8700명이 모인 서강대 페이스북 페이지에 '이게 머져? 바른포럼이 머에여?'하고 쓴 글부터 기사 퍼오며 좀더 심각하게 문제제기 한 글들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무단으로 수십개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고... 그리고 그 관리자는 이미 뭐 서강바른포럼 운영위원장에다가...-_-;;)


열이 받아서 학교 페이지는 들어가지 않기로 맘을 굳혔는데,

호기심이 고양이만 죽이는게 아니라 저도 죽여서 -_-;;

아까 클릭해봤더니 이런 글이 있더군요.


"생각이 다른 자들은 설득이 불가능한 족속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국가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해충들은 사라지는 것이 좋겠지요. 좀더 어정쩡하게 가다간 치유불능의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강 동문의 이름으로 박근혜는 절대 안 된다는 내용을 공표하고 그에 서명하는 자들을 뭘로 설득하지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의 길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한 선배님의 덧글인데 불펌해 왔습니다만..

제가 정말 뭐라고 덧글을 달려다가 그냥 여기다 털어놓는 걸로 대신하려 합니다.

이미 학교 내에서 소신발언;;을 너무 많이 해서,

진짜 잡혀가게 ^^ 생겼거든요.



근데 저걸 읽는데 진짜 소름이 돋는겁니다.

왜냐면 제가 지금 나치즘 책을 읽고 있거든요.

박 후보 (....입에 안 익네요.) 아니 박 대통령의 구호가

100퍼센트 대한민국이었죠?

그게 100퍼센트 순혈 아리아인 혈통 지키자는 나치 구호랑 뭐가 다르며,

설득 안되는 '해충'들은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 사라지는 게 낫다는 주장이

유대인들 다 모아다가 치클론 가스 멕여서 죽여버리자는 주장하고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역사의 언젠가 한 순간에는

그래도 나쁜 것들은 종식되기 마련이라는 희망을 얻고 싶어서

나치즘 책을 골랐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생겨서 책을 읽고 났더니 이러다 '호남의 별' 생기는거 아닌가 싶고 그러네요.

하하하하하하하하.

저랑 아빠는 사이좋게 그럼 노란색 호남의 별을 달고 수용소에서 만나 (................그만하겠습니다-_-)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왜 우리는 반성하는데 저들은 반성 안하냐는 겁니다.

왜 우리는 저쪽도 포용해야해 콘크리트층의 마음을 사로잡아야해 이러면서 전략 고민하고 자기반성하고 그러다가 너무 지나쳐서 우리끼리 서로 싸우고 그러는데

저들은 우리를 '해충'으로 운운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냐는 겁니다.

왜 항상 부끄러움은 우리 몫이고, 저들은 아무 부끄러움 없는지,

왜 오늘 슬픔을 느껴야 하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인지, 그는 슬퍼야만 할 짓을 한 적이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울컥해서 여기다 적어봅니다.


정말,

확신도 희망도 없는 세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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