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제대로 알게 된 건 중학교를 졸업하고였습니다.

중학교 때 선생님 한 분(제가 "선생"이 아니라 "스승"으로 칭하는 몇 안되는 분들 중 한 분이십니다)께서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을 읽어보면 좋다고 하셨어요.

부모님께 교양삼아 역사 공부를 하기 위함이라고 졸라서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 질을 샀지요. (이 책이 제 사상무장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면 부모님꼐선 분서를 하려 들 겁니다)


당시 제가 존경하던ㅡ요즘에는 존경도가 좀 떨어졌지만ㅡ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과 10.26 사건에 대한 얘기를 읽으려고 70년대편을 가장 먼저 펼쳐들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렇게 큰 분량이 할애되어 있지 않더라구요. 40년대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흐름 그대로 가기 위해 70년대 다음에 80년대를 읽었습니다.

1980년과 1987년 부분을 밤에 골방에서 읽었는데, "일제 시대 순사도, 6.25때 공산당도, 베트콩들도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지는 않았다", "저 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모두 죽여 버려야 해", 금남로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라는 부분을 읽고 있는데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습니다. 거울을 보니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더군요.

그 뒤로 헌책방 등지를 다니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새하얀 표지), "80년 5월 광주" 등을 사보면서, 역사 교과서에 달랑 한 문장으로 끝나던 것이 아 정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것이 이런 일이었구나. 그리고 그 가해자들과 학살자들이 아직도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에서, 그 대부분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 출신이며 이 지역이 그로 인한 수혜를 받았다는 것에서 일종의 부끄러움과 죄의식이 켜켜이 쌓였습니다(전 90년대 중반 출생입니다). 아직도 드라마 제5공화국 도청 진압 장면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무슨 정치논쟁. 이런 거 있을 때마다 의식적으로 다수와 반대 입장에 서려 했고, 내가 사는 지역 내가 속한 집단을 절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니, 의식적으로라기보다 의식 기저에 저런 부끄러움과 죄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 그렇게 저절로 표출된 거겠죠. 그래서 누구는 나보고 전라도 가서 살라는 소리도 하더만요.

영남과 호남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로 규정하고, 그 가해 집단에 속한 자 내지 그 가해의 혜택을 간접적으로 입은 자로서의 자아비판을 하려 했기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정작 전라도 분과 논쟁을 하고, 의문이 풀리지 않아 듀게에 고견도 구해 보면서, 그런 제 태도가 '어쨌든 가해자'의 아무것도 못 해주면서 생색내기. 오만 내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 생각 기저에 "영남 희생론"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구요(어쩌면 제 표현 능력의 부족 탓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건 중학교 졸업하고 광주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이후로, 그 때와 유사한 또다른 충격이라고 할까요. 생각을 추스르려면 얼마간 걸릴 것 같네요. 어떤 프레임의 전환도 필요해 보이고요. 성공할지 자신은 별로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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